1971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71년 8월 26일 용담지석묘 1 · 2 · 3 · 4 · 5 · 6호와 오라지석묘 1호, 도련지석묘 1 · 2호, 삼양지석묘 1호, 외도지석묘 1 · 2 · 3 · 4 · 5호, 광령지석묘 1 · 2 · 3 · 4 · 5 · 6호, 하귀지석묘 1 · 2호, 창천지석묘 1호, 신례리지석묘 1 · 2호 등 총 26기가 하나의 번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제주도에서 보고된 고인돌은 100여 기이다. 그 대부분은 지표조사를 통해서 확인되어 대정읍 가파도(加波島)에서 확인된 20여 기의 고인돌 일부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고인돌이 아닌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제주시 한천(漢川)변의 경우, 1959년 김철준(金哲埈)의 조사보고에 따르면 30여 기였던 것이 현재는 10여 기도 채 안 되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제주도 전역에 수백 기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고인돌은 다른 유물 산포지나 주거지, 패총 등의 생활 유적과 같이 대체로 해발 100m 이내의 해안지역에 분포한다. 한반도의 경우처럼 상호 몇 m 이내 거리에 무리를 지어 있는 경우는 없고, 가까워야 수십 m 또는 수백 m를 사이에 두고 있다.
10기 이상의 고인돌이 발견된 곳은 한천변의 제주시 용담동(龍潭洞), 외도천(外都川)의 외도동(外都洞)과 애월읍 광령리(光令里), 대정읍 동일리(東日里), 가파도 등이다.
특히, 제주시 한천과 외도천변에는 각각 20여 기 이상 있었거나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3∼5기 정도가 있는 곳은 제주시 삼양동(三陽洞), 애월읍 곽지리(郭支里), 대정읍 창천리(創川里), 서귀포시 상예동(上倪洞) 등이 있다.
제주도 고인돌의 형식은 6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제1형식은 지석(支石)이 없이 넓적한 상석(上石)만 있는 무지석식, 제2형식은 3∼4개의 지석으로 상석을 고인 형식이다.
제3형식은 지석을 2중으로 고인 형식이다. 제4 · 5 · 6형식은 지석을 판석으로 다듬어 만든 형식이다. 제4형식은 비탈면을 높은 쪽은 작고 낮은 괴석(塊石)으로 고이고, 낮은 쪽은 판석모양의 돌 1매로 고인 형식이다.
제5형식은 수매의 판석모양의 돌을 상석의 가장자리에 일정한 사이를 두고 고인 형식이다. 제6형식은 판석 10매 이상을 상석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거의 빈틈없이 고인 형식이다.
제1 · 2 · 3형식은 제주도 전역에 있지만 제4 · 5 · 6형식은 제주시 한천변과 외도천에서만 집중적으로 보인다. 특히, 제주시 한천변의 서쪽 용담동에는 3기의 대형 고인돌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잡고 있다.
용담동 1호는 320㎝×310㎝×80㎝ 크기의 상석을 70㎝×50㎝×20㎝ 크기의 판석모양 지석 13개로 고인 형식이다. 이러한 제6형식의 고인돌은 가장 발전된 형태로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어 ‘제주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고인돌의 연대는 제주시 용담동 2호와 남원읍 예례동의 고인돌의 발굴조사로 하부에서 출토된 곽지1식 토기를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곽지1식 토기는 곽지리 패총과 제주시 용담동 옹관묘 유적에서 대체로 철기와 타날무늬 회색도기(灰色陶器)와 함께 출토됨으로써 중심 연대는 1세기부터 3세기로 확인된다. 따라서 고인돌의 상한은 서기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지만, 특히 제4 · 5 · 6형식의 제주도 고인돌의 중심 연대는 서기 이후로 이해된다.
그 중에서 형식적으로 가장 발전된 제6형식인 제주도식 고인돌의 실제 연대는 더 늦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정확한 실제 연대는 곽지1식 토기의 형식분류와 편년이 더 진전될 때 단정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