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조선 전기에는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이라고 불린 2층의 건물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서 조선 후기에 단층건물로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건물은 넓고 탁 트인 평지에 뒤쪽으로는 경사진 산등성이를 등지고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기단(基壇)과 주변의 석축은 1973∼1975년에 크게 보수하였다. 잘 다듬은 화강석을 가구식(架構式)으로 앞면에 쌓고서, 나머지 3면에는 길고 큰 돌 1벌을 쌓은 모습이며, 윗면에는 전돌이 깔려 있다. 특히 기단의 가운데 부분에는 건물의 가운데 칸 너비만한 7층 계단이 있는데, 난간인 소맷돌의 모습과 결구(結構) 방식이 특이하다. 곧 소맷돌 앞면의 맨 앞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수평 부재가 놓였고, 그 위에는 둥근 곡선을 갖춘 3개의 부재를 차례로 쌓아올려 조립하였다. 맨 위의 부재는 볼록한 곡선부가 기단의 윗면보다 높이 올라가도록 처리하여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풍(遺風)을 보이지만, 용머리 조각은 대체로 조선 후기의 작풍(作風)으로 짐작된다. 기단 위에는 다듬지 않은 둥글고 넓적한 자연석을 주춧돌로 놓아서, 조선 후기의 돌 다듬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건물의 앞면 가운데 3칸의 주춧돌 사이에는 하나의 길고 큰 돌을 놓아 댓돌로 삼았다.
건물의 앞면에는 가운데 3칸에 ‘정(井)’자형 살문 두 짝을 달았던 반면, 좌우의 협간(夾間)에는 두 짝의 ‘정’자형 살창을 두었다. 뒷면에는 벽체의 중간에 중방(中枋)을 가로로 놓았는데, 중방 윗부분은 벽화를 그린 벽체로 이루어져 있지만, 중방 아랫부분에는 살문을 두었다. 특히 가운데 3칸의 살문은 사잇기둥을 세우고 따로 띠살문을 끼우는 고식(古式)으로 만들었으나, 좌우의 협간에는 각각 ‘정’자형 살을 갖춘 분합문(分閤門) 3짝을 끼워 놓았다. 좌우 양쪽면에는 앞쪽의 툇간에만 작은 외짝문을 달아 출입문으로 삼았으며, 가운데와 뒤쪽의 2칸은 모두 벽체로 마무리하고서 벽화를 그렸다. 건물 전체의 16칸 중에 4칸만 벽체이고 나머지는 모두 창호로 구성되었기에, 건물 안의 공간은 아주 밝은 편이다. 건물 안 창호 위의 벽체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건물의 평면은 안쪽에 2개의 고주(高柱)를 두어서 안둘렛간인 내진(內陣)과 밭둘렛간인 외진(外陣)을 나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면의 고주 중에 가운데의 2개를 생략하여 예불 공간을 넓혔기에 개방형 건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뒷면의 고주는 옆면 벽체의 고주와 같은 줄에 배열되어 있고, 고주 사이의 3칸에는 모두 후불벽(後佛壁)을 설치하고서 앞에 3칸 너비의 불단(佛壇)을 설치한 뒤 불상을 모셨다. 불단은 높은 하대목 위에 판 모양의 부재 3줄을 잇대어 만든 중대목을 얹고서 얇은 상대 갑판을 덮은 모습인데, 갑판 위는 안쪽으로 들여 중대목과 같은 모습의 1단 보조 탁자를 놓고서, 탁자 뒤에 석가모니불·약사불·아미타불 등 삼세여래좌상(三世如來坐像)을 8각의 목조대좌 위에 봉안하였다. 불상 뒤의 제법 높은 후불벽에는 칸마다 1폭씩 3폭의 후불탱화가 걸려 있고, 불상 위의 천장에는 평면이 ‘아(亞)’자형인 운궁형(雲宮形) 닫집을 매달아 화려하게 꾸몄다.
건물의 가구(架構)는 기둥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栱包)를 짜올린 다포(多包)계 양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들보는 몸채인 어간(御間)에만 2중으로 설치되었다. 천장에는 층급을 두었는데, 가운데 부분은 납작한 평천장(平天障)인데 반해, 그 둘레는 바깥쪽으로 기울어진 빗천장이다. 특히 빗천장을 격자(格子) 모양의 소란(小欄)반자로 마감하여 특이하다.
「법당상량시초록(法堂上樑始初錄)」에 의하면, 이 건물은 1649년(인조 27)에 다시 지어졌고, 1735년(영조 11)에 거듭 건립되었다고 전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1735년에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