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忠淸北道) 진천군(鎭川郡) 덕산면(德山面) 석장리(石帳里)에 소재한 삼국시대의 제철유적이다. 석장리 유적은 덕산면 옥동리(玉洞里)의 옥동초등학교가 있는 속칭 ‘양푼바위’마을에서 석장리 ‘돌실’마을로 이어지는 동쪽 길을 따라 500m 정도 가다가 남쪽으로 보이는 낮은 대지상 구릉에 위치한다. 이 곳은 구산리(九山里)·석장리(石帳里)·기전리(璣田里) 등 인접한 세 개의 마을에 걸쳐 해발 105.2m의 야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완만한 구릉의 서쪽 사면(70∼75m)에 해당한다.
유적은 국립청주박물관이 1989년과 1991년에 실시한 진천군 일대의 문화유적 지표조사과정에서 처음으로 확인하였다. 발굴조사는 1994년에서부터 1997년까지 4차에 걸쳐 실시하였다. 유적의 동쪽과 서쪽에는 같은 줄기의 완만한 구릉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들 구릉 곳곳에는 모두 7개소의 철생산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체로 해발 70∼75m 정도의 구릉 사면에 해당한다. 주변의 철생산 관련지는 괴산·제천·충주·보은·옥천 등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특히, 충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백산맥권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 유적은 철의 제련(製鍊)과 정련(精鍊), 단야(鍛冶) 등 일련의 철생산 공정이 한 장소에서 이루어졌음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발굴된 유구들은 대개 3~4세기경에 해당되기 때문에 한국 제철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석장리유적은 1994·1995년도에 조사된 A구와 1996·1997년도에 조사된 B구로 구분된다. A구와 B구는 같은 구릉의 경사면에 남북으로 약 2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철생산 또는 철제품 제작과 관련된 노적(爐跡)은 A구에서 13기, B구에서 23기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석장리유적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었다.
① 철의 원료인 철광석(鐵鑛石)과 사철(沙鐵)을 모두 사용하였다. 철광석은 5∼10cm 정도의 일정한 크기로 파쇄한 후 별도의 대상유구(臺狀遺構)에서 가열한 뒤 제철로 내에 들여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철은 금속학적인 의미의 사철이 아닌 철광석의 가루(철광분)로 생각된다.
② 노적(爐跡)의 입지는 A구와 B구에서 모두 작은 골짜기의 경사지를 이용한 한정된 공간이다. 다양한 노적(爐跡)이 밀집해 있어 매우 집약된 조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A구와 B구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일정한 공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이동조업(移動操業)하던 양상이 나타나고 있어, 철생산 활동이 일종의 정형화되고 규격화된 단위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③ 노의 성격은 A구와 B구 모두 제련로(製鍊爐)가 중심이다. 그러나 A구는 지형이 높은 동쪽에 2차 공정을 위한 노적이 분포하며, B구는 지형이 낮아지는 남쪽과 서쪽에 단야로로 추정되는 노적들이 위치하고 있다.
④ 노의 구조는 경사지를 이용해 간단한 기초시설을 한 지상식과 반지하식 등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A-4·8·9호와 B-4·5호 노에서는 외곽에 ‘ㄷ'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내부에 노를 축조하는 새로운 형태도 조사되었다.
⑤ 노의 형태는 대형상형로(大形箱型爐)를 비롯해 원형로(圓形爐)·방형로(方形爐)·장방형로(長方形爐)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B구는 A구에 비해 노의 규모가 다소 소형화되는 추세이고, 주변에서 단조박편(鍛造剝片)이 검출되는 소형로들이 많아 단야작업의 비중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A-1·2·3·4호와 B-7·11·12·23호 노적 등은 노의 형태와 구조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고대 제철로의 복원이 가능하다.
⑥ 노 주변에서는 철생산의 용매제(溶媒劑)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추정 석회석과 수골(獸骨), 조개껍질 등이 출토되었다.
⑦ 제철조업과 관련된 취사 및 제사행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도 조사되었다.
⑧ 노적 주변이나 노와 동일한 퇴적층에서 출토된 굽다리접시〔高杯〕·뚜껑접시〔蓋杯〕·발형토기·단경호 등의 토기류를 통해서 사용시기의 추정이 가능한데, 대체로 A구보다 B구가 다소 늦은 시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근의 산수리(山水里)·삼룡리요지(三龍里窯址)와 같은 시기로 판단된다.
석장리 일대는 조립(粗粒) 흑운모화강암(黑雲母花崗岩)과 우백질화강암(優白質花崗岩)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적이 위치하는 곳은 우백질화강암지대로 알려져 있다. 석장리 주변에서는 철과 관련된 구체적인 광상(鑛床)을 확인하지 못했으나, 백곡면 성대리(城大里) 부근에는 자철석과 티탄철석 사광(砂鑛)의 모암(母岩)이 형성되어 있다고 보고되어 있다.
조성시기는 A구 4-1호 구덩이에서 출토한 목탄시료를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나왔다. 따라서 비록 계절적으로 한시적인 조업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곳을 비롯한 주변지역에서 상당기간에 걸쳐 철생산활동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장리유적은 한국에서 조사된 최초의 고대 철 생산 유적으로, 인근의 삼룡리·산수리 요지와 함께 초기 백제의 생산 체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지상식 대형 상형로(箱形爐), 반지하식 원형로 등 다양한 형태의 고대 제철로 26기가 확인되었다. 대형상형로를 포함한 다양한 제철로의 존재는 백제의 제철기술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제련에서 단야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공정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유적이며, 고대 철생산에 있어 제철로(製鐵爐)의 다양성과 그 기술적 수준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석장리 유적은 고대 제철의 입지 선정과 철 생산체계 및 조업형태 등에 대한 연구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인근의 토기생산 유적인 산수리·삼룡리요지와 함께 초기 백제의 생산체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며, 이 유적은 특히 대형제철로는 그 형태상 일본의 고대 제철로인 상형로의 조형으로 생각되고 있어 초기 백제의 고도로 발달한 제철기술이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