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좌일 ()

사명자시집 / 차좌일
사명자시집 / 차좌일
한문학
인물
조선후기 『사명자시집』을 저술한 시인.
이칭
이칭
숙장(叔章), 사명자(四名子)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53년(영조 29)
사망 연도
1809년(순조 9)
본관
연안(延安)
주요 관직
만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후기 『사명자시집』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숙장(叔章), 호는 사명자(四名子). 차천로(車天輅)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차윤태(車潤泰)이다. 어머니 백씨(白氏)가 그를 잉태하였을 때 하지장(賀知章: 중국 당나라의 시인)을 꿈에 보아 그의 자와 호를 따라 지었다 한다.

생애 및 활동사항

하지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소식(蘇軾)의 흔적도 많다.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서화나 음률·사예(射藝)에도 뛰어났다. 특히 시를 잘하여 당대의 문장가였던 홍양호(洪良浩)·윤행임(尹行恁)·윤사국(尹師國)·정약용(丁若鏞) 등이 자리를 함께 하여 시를 지을 정도였다.

재주는 뛰어나지만 관직이 한미하여 만년에 만호(萬戶)라는 무관말직(武官末職)에 머물렀던 만큼 세상에 대한 불평의 뜻이 많았다. “살아서는 취향백(醉鄕伯), 죽어서는 수문랑(修文郎)”이라는 그의 시는 시와 술에 경도되었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또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이 나라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하소연은 제도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동생과 두 아들이 죽은 뒤 더욱 시와 술에 탐닉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했다.

천수경(千壽慶)·장혼(張混)·왕태(王太)·최북(崔北)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결성하여 비분(悲憤)과 고뇌를 시로 풀었다. 시집으로는 『사명자시집(四名子詩集)』이 전한다. 그의 시는 유재건(柳在建)이 편한 『풍요삼선(風謠三選)』과 일본인 아오야마[靑山好惠]가 편한 『명가시집(名家詩集)』에도 실려 있다.

참고문헌

『국문학논고』(구자균, 박영사, 1966)
관련 미디어 (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