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5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여 초대 교장에 김윤정(金潤晶)이 취임하였다. 신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인천의 선각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인천 지역 최초의 공립학교였다. 설립 당시 수업연한 4년에 3명의 학생이 입학하였으나, 1907년 6월 사립 제영학교를 병합하여 2학급 74명으로 증원되었다.
1910년 제1회 졸업생 18명을 배출하였고, 1912년 사립 인명학교를 병합해 여자 학급을 신설, 23명의 여학생이 입학하였다. 1913년 공립간이상업학교를 부설하여 운영하다가 3년 후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이양하였다.
1916년에는 학생 수가 549명(남 396명, 여 153명)으로 증가하여 2부제 수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21년부터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향학열의 고조로 교실이 부족해짐에 따라 장석우(張錫佑)를 회장으로 기성동맹회를 조직, 교사를 신축하고 강당 · 운동장을 개축하여 18학급으로 편성하였다.
1933년 인천제일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초등교육의 속성 보급을 목적으로 5년간 강습회 학생을 받아들여 915명을 수료시켰다. 1938년 인천창영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인천창영공립국민학교, 광복 후 창영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96년 창영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교훈은 1945년에 제정한 ‘서로 사랑하자, 부지런히 일하자, 약속을 지키자’이다. 희구하는 인간상은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건강하고 창의적인 창영어린이’이며, 이를 위해 ‘학교를 사랑하고 우리 문화를 존중하는 어린이, 질서를 잘 지키고 타인을 배려하는 어린이, 스스로 학습하고 탐구하는 어린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생활하는 어린이’를 교육목표로 삼고 있다.
인천 지역 3·1운동의 진원지로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의 3학년생 김명진 · 이만용 · 박철준 등은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검거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교내에는 인천에서 최초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3ㆍ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47년 9월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보이스카우트를 창립, 보급한 공로로 1956년 보이스카우트세계연맹 스프라이 사무총장이 학교를 방문한 바 있고, 1946년부터 1952년까지 매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창영초등학교의 아동극을 방송하기도 하였다.
1954년 문교부 주최 교육연구협의회를 개최하였고, 1955년 문교부 지정 시범학교, 1976년 도서관 운영 시범학교, 1989년 식생활교육 시범학교, 1996∼1997년 체육교육 시범학교를 운영하였다.
체육활동으로 1952년 전인천국민학교축구대회 우승, 1956년 전국수영대회 평영 100m 신기록 수립, 1964년 경기도체육대회 체조부 우승, 1995년 교육감배 야구대회 우승, 1997년 인천광역시소년체전 여자배구부 우승 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1946년 제2회 어린이날 기념 운동회를 실시한 이래 매년 거행해 오다가, 2000년부터 대운동회와 하계회를 격년제로 실시하고 있다.
특색교육으로는 2013년 현재 전교생을 대상으로 자신과 일의 세계를 스스로 이해하고 일을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으로 인식하며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맞는 일을 통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꿈을 꾸고 찾아서 준비하는 꿈실현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2013년 현재 특수학급 2학급을 포함하여 17학급에 총 345명(남:199명, 여:146명) 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103회 졸업식을 거치면서 총 40,2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2012년 9월 제22대 정태조 교장이 취임한 이후, 이정자 교감을 포함하여 총 25명의 교직원(유치원 교사 1명)이 재직하고 있다.
구 본관 교사(校舍)는 199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