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리 ()

목차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때, 대사자, 국상 등을 역임하였으며, 봉상왕의 폐위와 미천왕의 옹립을 도모한 고구려의 관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대사자(大使者)|국상(國相)
관련 사건
봉상왕 폐위|미천왕 옹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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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삼국시대 때, 대사자, 국상 등을 역임하였으며, 봉상왕의 폐위와 미천왕의 옹립을 도모한 고구려의 관리.
내용

294년(봉상왕 3) 국상(國相) 상루(尙婁)가 죽자, 그에 이어 당시 대사자(大使者)였다가 국상에 임명되었다. 296년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廆)가 침공하여 오자, 창조리는 대형(大兄) 고노자(高奴子)를 왕에게 천거하여 그로 하여금 모용씨의 침공을 막게 하였다.

그런데 봉상왕은 그의 작은아버지이며 숙신(肅愼) 등을 공벌하여 복속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던 달가(達賈)와, 친동생인 돌고(咄固)를 죽이는 등 왕족들의 세력을 억압하였고, 또 한편으로 궁궐을 증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였다.

이와 같은 봉상왕의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일으켰으며, 연속된 흉년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강행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창조리는 이의 중지를 간하다가 왕과 마찰을 일으켰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다른 귀족들과 함께 봉상왕의 폐위를 도모하였다.

300년 왕이 후산(侯山)에 사냥을 나가자, 이를 기회로 삼아 거사하여 왕을 폐하고 별실에 가두었다. 이에 봉상왕은 사태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자살하였다.

이에 앞서, 창조리는 미리 봉상왕의 박해를 피하여 산야에 숨어 살던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 미천왕)을 찾아내어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다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맞아들여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은 전하여지는 바가 없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국상고」상·하(노중국,『한국학보』16·17,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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