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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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군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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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전라남도담양지역의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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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담양지역의 옛 지명.
내용

백제 때는 굴지(屈支)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기양(祈陽)으로 개칭되고 무주(武州)의 영현이 되었으며, 940년(태조 23)에 창평(혹은 鳴平)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는 나주목의 임내였다가 중기에 현령관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한 현리(縣吏)가 남적(南賊) 이연년(李延年)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승격시킨 것이다. 1391년(공양왕 3) 광주목 임내 장평부곡(長平部曲)과 갑향(甲鄕)이 편입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직촌(直村)으로 편입되었다.

1474년(성종 5) 한 현인(縣人)이 현령을 능욕한 죄로 수령이 폐지되고 광주목의 속현으로 편입되었다가, 5년 후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 군이 되어 남원부에 속하였고 이듬해전라남도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담양군에 병합되어 창평면이 되었다.

이곳은 무등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동서로 감싸면서 북쪽으로 뻗쳐 있고, 그 사이에 견암천(甄巖川)과 고산천(高山川)이 넓은 퇴적평야를 만들면서 영산강의 지류인 동강(桐江)에 합류하고 있다.

현의 치소(治所)는 본래 서쪽 고산(高山) 부근에 있었는데 1793년(정조 17) 동북쪽의 현 위치로 옮겼다. 창평을 중심으로 광주ㆍ담양ㆍ동복ㆍ장성 등지와 연결되는 도로망이 발달하였고, 동강유역에는 외창(外倉)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김천일(金千鎰)이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숙종 때 세워진 해곡리의 송강서원(松江書院)에는 이곳에서 성장한 정철(鄭澈)을 배향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유허비 등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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