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여와 비슷하게 생겼다. 왕실에 의식이 있을 때 귀중품을 옮기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사면을 아름다운 꽃무늬로 채색하고 들채가 있어 앞뒤 두 사람이 메게 되어 있다.
『고려도경』의 채여에 대한 기록에는 “채여는 셋인데, 하나는 조서를 봉안하고, 또 하나는 어서(御書)를 봉안하며, 앞의 한 채여에는 대금향구(大金香毬 : 도금한 향구로 渾天儀와 같은데, 그 가운데 3층으로 된 빗장이 끊임없이 움직인다.)를 담았다.
그 제도는 오색무늬 비단을 쓰고 사이사이에 금수(錦繡)를 섞어 맺었으며, 위에는 비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개의 대[竿]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강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왕세자와 고려의 관리들이 조서를 맞아 길목에서 채여를 바라보고 절하였다.”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