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범(君範), 호는 봉암(鳳巖)·삼환재(三患齋)·봉계(鳳溪)·사장와(舍藏窩).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채영용(蔡領用)이며, 어머니는 유씨(柳氏)로 유승주(柳承胄)의 딸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동문인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윤혼(尹焜)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 스승의 영향으로 과거 공부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고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실천적 수행에 힘써 당시 많은 학자들로부터 추앙받았다.
1718년(숙종 44) 암행어사 황구하(黃龜河)와 관찰사 등이 뛰어난 학행으로 추천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21년(경종 1)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그 해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소론의 죄를 논하여 배척하는 소를 올렸으며, 이후 구운산(九雲山)에 들어가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725년(영조 1) 노론이 다시 집권하자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민진원(閔鎭遠)의 강력한 요청으로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있다가 역시 사퇴하였다. 이어서 빙고별제(氷庫別提)로 다시 기용되고, 몇 개월 뒤 부여현감으로 나갔다가 사퇴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고을 선비들과 함께 격문을 써 붙여 적도(賊徒)들에 가담하는 자들을 회유하였고, 의병을 모집하던 중에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 해 가을 청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1740년 형조좌랑에 임명되고,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를 거쳐 공홍도도사(公洪道都事)에 취임하였다가 사퇴하고 귀향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경학·예학을 비롯하여 역사·천문·지리·상수(象數) 등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 있어서는 한원진과 함께 호론에 속하였다. 저서로는 『봉암집(鳳巖集)』·『성리관규(性理管窺)』·『세심요결(洗心要訣)』·『독서전보(讀書塡補)』·『천문집(天文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