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天馬塚)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조성한 고분공원[大陵苑] 안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황남동 제155호분으로 관리되어 왔다. 당시 정부의 경주종합개발계획에 의거 황남동 제98호 고분의 내부를 공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제98호분은 한국 최대형 고분이므로, 이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이 고분보다 소형의 고분을 발굴하여 경험과 정보를 얻은 후, 제98호분을 본격적으로 발굴한다는 방침을 세워 제155호분을 먼저 발굴하게 되었다. 1973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 조사단에 의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155호분 천마총도 대형에 속하는 고분이고, 당시까지 발굴조사된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거의 완형에 가까운 고분이어서 신라의 왕릉급 대형고분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제공하였다.
고분이 소재한 곳은 경주분지 내의 거의 중심지이며, 주위는 논과 밭, 그리고 민가가 밀집되어 있는 평탄지에 속하고, 서천(西川)과 남천(南川)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지형으로 토질은 사질토(沙質土)와 냇돌로 이루어졌다. 고분의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분류된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金冠) · 금제관모(金製冠帽) · 금제과대(金製銙帶)가 1978년 각기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분의 규모는 분구 높이 12m 70cm, 분구의 바닥지름 47m인 원형의 봉토분(封土墳)이다. 분구의 자락에는 돌로 쌓아 만든 호석(護石)이 돌담 형식으로 돌려 있다. 호석은 현 지표로부터 1.2m 높이에 있고, 직경은 약 20cm 내외의 냇돌[천원석(川原石)]를 사용하였다. 분구의 토층은 황갈색 점토를 지표에서 75cm까지 쌓고, 그 위부터 4m 높이까지는 황갈색 흙과 직경 약 10cm 정도의 자갈이 섞였다. 분구의 4m 이상부터 정상부까지의 적토(積土)는 흙과 자갈이 혼합된 층인데, 이 층은 내부 중심을 향해 경사지고 높이 올라갈수록 경사도가 급해졌다. 적석부(積石部) 상위 봉토의 두께는 6.2m이다.
적석부는 냇돌로 형성되었으며, 상단은 동서 15.5m, 남북 13m의 타원형이었고, 그 중앙에 동서 8.8m, 남북 7.5m의 함몰부(陷沒部)가 있다. 적석부 표면은 분구 정점에서 2.6m 높이까지 약 15∼20cm 두께로 점토층이 피복되었고, 외면의 경사도는 50∼60° 정도로 다소 급한 편이다. 적석부의 측벽 바닥의 너비는 동서에서 각각 8m 50cm이고, 전체 적석부의 바닥 직경은 23.6m이고, 높이는 6m로 적석부 위 봉토 두께와 같다. 적석부의 평면은 대체로 방형(方形)을 띠고 있는데, 전체 형상은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으로 마치 고구려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비슷하다. 적석부의 바닥은 목곽(木槨)의 바닥보다 38∼39cm 정도 낮다.
목곽부(木槨部)는 분구의 중심부 적석의 하부에 설치되었고, 무덤의 핵심부를 이룬다. 규모는 장변 6.6m, 단변 4.2m, 높이 약 2.1m(복원치)로 벽과 천정이 목재로 짜여진 목실(木室)이다. 목곽의 밑은 두께 40cm를 인두대의 냇돌과 자갈을 깔아 상면을 고르게 하고, 그 위에 목재로 관대를 마련하였다. 벽면은 판재가 아닌 통나무[原木]를 통째로 사용하였는지 또는 쪼갠 것을 사용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벽면이 서로 접하는 네 귀퉁이는 귀틀짜기 식으로 결구(結構)하였다.
그리고 당초에는 목곽의 전체에 붉은 옻칠을 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그것은 목곽의 상면(床面) 판재를 붉은 옻칠을 하였고, 또 목곽 주위의 냇돌에서 붉은 옻칠 흔적이 다수 발견되는 점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목곽의 바닥 유물층에 도달하기 직전에 쇠막대기[환두철봉(丸頭鐵棒)] 2개가 동서 길이 2.2m, 남북 너비 1.2m의 범위로 발견되었는데, 이 범위가 천정부에 설치한 출입문[開口部] 시설이고, 쇠막대기는 문의 빗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목곽은 목실 형식이고, 이 출입문을 통하여 관과 궤(櫃)를 격납하고, 작업 인부(人夫)가 출입한 것으로 보인다.
목곽 내에는 목관과 껴묻거리수장궤[副葬品收藏櫃]가 안치되었는데, 목관은 목곽의 중심에 동서 축선에 길이로 놓이고, 그 동쪽에 수장궤를 남북으로 놓아 관과 T자형을 이루게 하였다. 목관의 크기는 유물의 배치 등으로 미루어 보아 동서 길이 2.2m, 남북 너비 80cm로 추정된다. 수장궤는 남북 길이 1.8m, 동서 너비 1m, 높이 약 80cm이다.
고분 내에서 유물이 출토된 곳은 ①분구 내부, ②목곽 상부, ③목관의 주위와 내부, ④껴묻거리수장궤 안 등 4곳이다. ①과 ②의 유물은 껴묻거리라기보다는 고분축조와 관련된 의식용(儀式用) 유물이라고 할 수 있고, ③과 ④의 유물이 시체매장과 수반된 유물로 진정한 의미의 껴묻거리, 이른바 부장품이다.
①에서는 분구 정상부의 표토 아래 1.9m 지점에서 마구류(馬具類) 일괄유물과 유자철기(有刺鐵器) 철제낫 · 철모 · 유리옥 등이 발견되었다. ②에서는 적석부의 함몰 부분 아래의 목곽 측벽 위에서 철제 공부(銎斧)와 일렬로 배치된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남측 벽에서 금제태환이식(金製太環耳飾) 2쌍, 금제세환이식(金製細環耳飾) 3쌍이 출토되었다.
③에서는 우선 목곽 주위에서는 환두철봉(環頭鐵棒) 2개, 관모(冠帽) · 과대(銙帶) 및 요패(腰佩) · 옥류(玉類) 등 장신구류, 자작나무껍질[白樺樹皮]관모, 은제이형요패(銀製異形腰佩), 은제우각형구(銀製牛角形具), 대형은제요패(大形銀製腰佩) 2조, 은제과판(銀製銙板) 32개, 대소(大小) 옥류 5,000여개 등 장신구와 대형 철정(鐵鋌), 소형 철정, 대도(大刀), 측도부은도(側刀付銀刀), 삼지모(三枝矛), 유경삼각형철촉(有莖三角形鐵鏃), 금은장삼환대도(金銀裝三鐶大刀) 등 무기류와 철제등자(鐵製鐙子), 교구(鉸具), 금동제복륜(金銅製覆輪), 금동제선형구(金銅製扇形具) 등의 마구류가 발견되었다. 목관 내부에서는 금관(金冠)은 삼수지형입식(三樹枝形立飾) 3개와 녹각형입식(鹿角形立飾) 2개 및 수식이 달려 있었다. 금제세환이식, 목걸이[頸飾], 금제과대(金製銙帶), 금제팔찌[金製釧], 은제팔찌[銀製釧], 금제가락지[金製環], 금동투조조형수식(金銅透彫鳥形垂飾) 등 장신구와 봉황두식금동제대도(鳳凰頭飾金銅製大刀) 등이 출토되었다.
④에서는 금제조익형관식(金製鳥翼形冠飾), 금제나비형관식, 금동관(金銅冠), 금동투조금동관모(金銅透彫金銅冠帽), 금동경갑(金銅頸甲), 금동투조신발[金銅透彫靴] 등 장신구류와 은장복륜(銀裝覆輪), 청동제마탁(靑銅製馬鐸), 금동투조판식죽제장니(金銅透彫板飾竹製障泥), 자작나무껍질천마도장니[白樺樹皮天馬圖障泥], 서조도채화판(瑞鳥圖彩畵板), 기마인물도채화판(騎馬人物圖彩畵板), 금동판피말안장[金銅板被鞍橋], 목심금동판피발걸이[木心金銅板被鐙子], 금동경판(金銅經板), 말재갈[馬銜], 운주, 옥개형금동구 등과 청동제초두(靑銅製鐎斗), 철제솥[鐵製鼎], 은제대합(銀製大盒), 금동제대합(金銅製大盒), 금동제소합(金銅製小盒), 금동제대형고배(金銅製大形高杯), 우각형금동잔(牛角形金銅盞), 국자형칠기, 칠기잔류(漆器盞類), 찬합칠기(饌盒漆器), 토제구슬[土製玉] 159개 등 마장식구류(馬裝飾具類)와 기기류(器機類)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상의 유물의 수량은 장신구류 8,767개, 무기류 1,234개, 마구류 504개, 용기류 226개, 기타 796개, 총합 11,526개이다.
위의 껴묻거리 중에서 금관은 실용관이라기보다 의식용관(매장용 등)이라 할 수 있고, 금모(金帽)는 실용관이라 할 수 있다.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의 천마는 비상하는 모습으로 고구려벽화의 무용총(舞踊塚) 수렵도(狩獵圖)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천마의 말꼬리와 천마 주위의 당초문(唐草文)과 운문(雲文) 등은 고구려벽화와 양식적인 면에서 분명 유사한 점이 많다. 신라 지역의 거의 유일한 영주 태장리의 고분벽화와 함께 고구려벽화고분의 영향을 잘 나타내 준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고분벽화가 별로 없는 신라의 회화자료로서 천마총의 천마도는 매우 귀중하다고 하겠다. 근자에 천마에 대하여 기린이라는 이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천마총은 분구의 지름이 47m나 되고 높이도 12.7m가 되는 거대고분에 속한다. 고분의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장법은 바로뉘어묻기[앙와직지신전장(仰臥直肢伸展葬)]를 채택하였고, 홀로묻기[單葬]이다. 순장(殉葬)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다만 발굴보고서에서는 분구 중에서 발견된 마구는 말 순장의 전통을, 목관 위의 세환이식(細鐶耳飾)과 수장궤(收藏櫃) 위의 태환이식(太環耳飾)은 남녀 순장의 전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삼국사기(三國史記)』지증왕(智證王) 3년조에 순장금지 기사가 있어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점과 많은 고분에서 출토되는 이식의 과다한 수량을 해석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그리고 목곽(장변 6.6m, 단변 4.2m, 높이 2.1m)의 공간이 그 안에 안치한 목관(동서 2.2m, 남북 80cm)과 수장궤(동서 길이 1m, 남북 너비 1.8m, 높이 약 80cm)가 들어가고도 과도하게 넓은 공간이 남아 있는 점, 목곽 안벽에 잇대어 돌담이 돌아가면서 축조되었고 다시 목관의 주위에도 석단이 돌려 있는 점, 돌담과 석단 그리고 목관과 수장궤 상면의 공간 등 여러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목곽은 적석부 봉토와 같은 단순한 목관 보호의 외피시설의 기능만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이 목곽은 당초 목관을 안치하고 빈전(殯殿)으로 사용하다가 빈장(殯葬)기간 후에 적석과 봉토를 올려 분구를 완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목곽을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지상에 묘단을 축조하고 그 위에 설치한 점은 더욱 더 빈전이었을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 고분의 축조 연대에 관하여 잠시 말하여 두고자 한다. 목관편(木棺片)의 방사성탄소측정(원자력연구소 검사) 연대는 서기 340년±70년이므로 축조 연대는 서기 270년∼410년 사이에 들어간다. 이 연대는 다소 이른 감이 드는데, 그것은 아마도 목관재료 자체의 연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과 지증왕을 이 고분의 피장자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분지에서의 돌무지덧널무덤이 지증왕대까지 축조되고, 그 다음 법흥왕(法興王)대부터는 서악동 무열왕릉(武烈王陵)의 후방 왕릉군(王陵群)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황남동에서의 돌무지덧널무덤의 연대는 6세기에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또 천마총의 묘단 · 목곽부 · 적석부 · 분구 등 구성요소의 규모가 합리적 비례를 취하고 있고, 목곽 · 수장궤 및 천마도 · 금관이식 등은 다른 무덤에서 볼 수 없는 발달된 양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황남동에서는 최후 단계인 6세기 초의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잠정적으로 지증왕의 왕릉으로 추정하여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