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두고 있던 때에 조성된 분묘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69년에 중국 동진(東晋)제의 청자반구호(靑磁盤口壺)와 각종 백제토기, 살포 등의 철기가 일괄로 출토되어, 4세기대 한성백제토기의 편년에 한 근거가 되었으며 당시 백제의 대중국 관계 및 지방 지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이후 1991년에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일괄유물이 출토된 지점의 동남쪽으로 110여 m 떨어진 구릉에서 은상감고리자루큰칼[銀象嵌環頭大刀] 등이 출토되는 움무덤[土壙墓] 1기를 다시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이 유구 주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널무덤[木棺墓] 7기와 나무덧널무덤[木槨墓] 2기 등 9기의 무덤과 성격 미상의 기둥구멍 자리가 조사되었다.
수신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500m 쯤 가서 북쪽으로 천남초등학교를 지나 1.6㎞ 정도 가면 유적이 있는 화성리 화원 마을이 나온다. 이 일대는 해발 40m 내외의 나지막한 구릉 지역으로서,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의 북쪽 사면에서 3기(A지구), 남쪽 사면에서 6기(B지구)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이 지역은 마을 뒤의 세성산(細成山)이 배후를 감싸고 있어 조그마한 분지성 지형을 하고 있으며, 백제토기가 이 일대에 많이 보이고 있어 주변에 고분과 관련된 취락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유적에서 남쪽으로 약 1㎞ 떨어져 낮은 계곡을 하나 사이에 두고 원삼국시대의 천안 신풍리 고분군이 있다. 또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수신면(修身面) 장산리(長山里)에서는 신풍리 고분군과 같은 시기의 취락과 논 유적이 조사되어, 원삼국시대에서 백제시대까지의 토기와 묘제 변천 양상은 물론 지역집단의 성격 변화 등을 잘 보여준다.
무덤은 모두 등고선과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장방형(長方形)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널이나 덧널을 놓았다. 구덩이 깊이는 B-1호분이 1.09m로 깊지만 대부분 0.1∼0.3m로 얕게 남아 있다. 봉토는 남아 있지 않으나 중복된 것이 전혀 없고 B-1호분의 토층에서 최소 0.5m 높이의 봉토가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야트막한 봉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덩이 규모는 은상감고리자루큰칼과 쇠투겁창(鐵矛)이 출토된 A-1호분이 2.7×1.35m이며, B-1호분이 3.18×1.24m 크기이다. 매장주체부의 크기는 덧널무덤인 B-1호분의 경우 덧널의 길이, 너비, 깊이가 2.82×0.94×0.75m에 널은 1.8×0.45×0.45m이며, 덧널을 받치는데 사용한 기둥구멍이 구덩 벽을 따라 10개가 있다. 한편 널의 장단비는 2.5 내외로 장방형인 것과 3.2 이상으로 세장방형(細長方形)인 것이 있다.
화성리 널의 특징을 보면, 먼저 결구방법에서 꺾쇠가 출토된 B-1호를 제외하고는 조합식으로 결구한 점에서 이 지역의 원삼국시대 널무덤이나 인근의 천안 용원리 유적의 것들과 유사성을 보여준다. 널의 평면형은 총 4가지가 있는데, 이 중 ‘∏ 형’은 평양 지역의 정백동 5호분 등에서 보이는 것과 동일하다. 이 중 ‘장방형 네모형’은 부장품이 관 안에 놓여 있어 덧널 개념을 갖고 있으나, 크기가 2.15×0.59m로서 나머지 널들과 거의 동일하다. 한편 널이 구덩이의 가운데 놓여 있지 않고, 남서 장벽과 남동 단벽쪽으로 치우쳐 있는 점도 한 특징이다. 두향은 B-1호분의 인골과 A-1호분의 대도(大刀) 위치로 보아 모두 동향(東向)을 하고 있어, 사면 방향과는 관계없이 동일한 침향을 하고 있는 점이 장제(葬制) 관념상의 특징으로 생각된다.
출토유물은 각종 토기와 큰칼·쇠투겁창 등의 무기, 방제경(倣製鏡), 쇠낫, 옥 등이 있다. 토기류는 1969년도에 출토된 손잡이잔과 함께 입곧은항아리[直口短頸壺]와 입큰목긴항아리[廣口長頸壺], 깊은바리모양[深鉢形]토기, 난형항아리[卵形壺] 등 전형적인 한성백제양식토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A-2호분에서는 흑색마연의 입곧은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일괄 수습품 중 동진제 청자반구호는 중국 남경 상산 1호분 출토품과 기형이 매우 흡사하여 4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며, 백제 중앙에 의해 수입되어 이 지역 집단에게 분여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수입 자기와 토기 등으로 보아 화성리 고분군의 축조연대는 4세기 후반∼5세기 초 무렵에 걸쳐 있는 것으로 생각되나, 전체 유적이 조사된 것은 아니어서 그 연대는 약간 조정될 여지가 있다. 한편 A-1호분에 출토된 은상감고리자루큰칼은 상감이 매우 정교한 것으로서 일본의 칠지도(七支刀)와 함께 4세기대에 백제 금공예 제작기술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청자반구호와 은상감고리자루큰칼, 백제토기 중 위신재로서의 성격이 매우 강한 흑색마연토기 등은 이 지역 집단이 백제 한성기 후반에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