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화는 아미타불과 팔보살, 십대제자, 사천왕(四天王)과 청문중(聽聞衆)을 묘사한 아미타불회도(阿彌陀佛會圖)로, 극락전의 주존불 뒤에 상단화(上壇畵)로 봉안되어 있는 후불도(後佛圖)이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1776년(영조 52) 수화사(首畵師) 신암(信菴) 화련(華連)을 비롯한 13인의 화승들이 조성하였다. 삼베 바탕에 채색한 작품으로, 크기는 세로 360㎝, 가로 277㎝이다. 198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큰 화면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아미타팔대보살(阿彌陀八大菩薩)과 십대제자(十代弟子)와 사천왕(四天王), 타방불(他方佛) 등의 아미타설법회(阿彌陀說法會)를 묘사하였다. 십대제자는 여덟명만 묘사되어 있다.
각각의 존상 옆에는 긴 방형의 난을 만들고 존상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중앙의 본존 옆에는 ‘광명보조수명난사48대원무량수여래불(光明普照壽命難思四十八大願無量壽如來佛)’이라고 기록되어 아미타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아미타불 바로 아래쪽으로 두 보살상은 ‘문성구고관세음보살(聞聲救苦觀世音菩薩)’과 ‘섭화중생대세지보살(攝化衆生大勢至菩薩)’로 기록되었으며 그 위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과 제장애보살(除障碍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짝을 이루며 좌우 대칭으로 아미타불을 시위하고 있어 이 여덟 명의 보살이 아미타팔대보살임을 알 수 있다.
아미타팔대보살은 고려시대 불화의 도상에서도 보이는데 8세기 후반에 한역(漢譯)된 불공(不空) 역(譯) 『팔대보살만다라경(八大菩薩曼茶羅經)』이 이 도상의 등장과 관련된 유력한 소의경전으로 지적되어 왔다. 특히 고려 불화에서 8대보살이 묘사되었지만, 도상에 따른 존명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천은사아미타후불탱화」가 아미타팔대보살의 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아미타팔대보살의 도상과 존명이 고려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고려시대 아미타팔대보살의 존명과 도상은 앞으로의 연구가 요구된다.
또한 이 불화는 아미타팔대보살의 도상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배치와 존명 문제에도 중요한 해석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통상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 한국의 사천왕상 가운데 탑 또는 당(幢)을 들고 있는 천왕은 북방의 다문천(多聞天)으로 비정되었다. 그러나 이 불화에서 사천왕 옆에 존명이 기록되면서 탑을 들고 있는 상은 북방 다문천이 아닌 서방 광목천(廣目天)으로, 동방 지국천(持國天)으로 불려왔던 비파를 든 상은 북방 다문천으로 확인된 것이다. 결국 천은사아미타후불탱화의 존명에 따르면 동방→북방, 남방→동방, 서방→남방, 북방→서방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천은사 불화의 방제로 파악할 수 있는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존명과 배치에 대하여 「아미타후불도」를 그린 화가의 실수이거나 미숙의 결과로 보는 연구도 있지만, 조선 후기 불화인 「마곡사괘불도」(1687년), 「장곡사괘불도」(1773년) 뿐만 아니라 같은 「천은사삼일암아미타후불도」(1853년)와 19세기 추정 「대승사후불목각탱」(後佛木刻幀) 등은 천은사 불화의 사천왕상 존명과 같아,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존명과 배치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더불어 순천 송광사 천왕문(天王門)의 사천왕상(四天王像) 복장에서도 비파를 든 천왕이 북방 다문천왕이며 당(幢)이나 탑을 든 천왕이 서방 광목천왕이라는 존명을 알려주는 명문 묵서가 발견되어 천은사 사천왕상과 그 존명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 존명과 도상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고 있으며 남색도 군데군데 설채되었다. 중앙의 아미타불은 낮은 육계가 특징이며 얼굴은 방형보다는 원형에 가깝다. 이에 비해 보살상들의 얼굴은 긴 편이다. 문양도 다채로와서 본존과 보살상의 옷에는 국화문, 옷의 가장자리에는 연화문이 시문되었고 본존의 오른팔에는 검은 투명망사와 같은 재질의 독특한 법의를 걸치고 있다. 아미타불화의 화면 바깥 테두리에는 고려 불화의 수월관음도 투명 베일에 가장 많이 시문되었던 흰색의 마엽문(麻葉文)을 그려넣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더불어 본존의 대좌 가운데에는 삼태극문(三太極紋)도 보여 다양한 장식문양을 볼 수 있다.
1776년(영조 52)에 신암(信菴)을 비롯한 승려화가 13명이 그린 이 그림은 제작 연대와 그림 제목, 그리고 각 존상의 존명을 확인할 수 있는 방제(旁題)가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아미타팔대보살 및 사천왕상의 명칭과 배치문제에 귀중한 실마리가 될 뿐만 아니라 18세기 아미타불화의 도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