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성교공과는 한국천주교회가 공식적인 기도서로 사용한 천주교서이다. 공과(功課)란 광의로는 매일의 기도를 말하고, 협의로는 주일과 축일의 기도 및 여러 상황에서 필요한 기도문을 수록한 기도서를 말한다. 앵베르(Imbert,L.M.J., 范世亨) 주교가 남녀노소, 유식·무식을 막론하고 누구나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기도문을 번역하였다. 앵베르 주교가 순교한 뒤에 최양업 신부, 다블뤼 주교, 베르뇌 주교 등이 참여하였다. 먼저 필사본으로 신자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고, 1862∼1864년(고종 1)에 4권 4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공과(功課)’로 불린다. 공과란 광의(廣義)로는 매일의 기도를 뜻하고, 협의(狹義)로는 주일과 축일의 기도 및 여러 상황에서 필요한 기도문을 수록한 기도서를 의미한다.
원본은 중국 공과, 즉 한문본이고 그것을 우리말로 옮긴 이는 일반적으로 앵베르(Imbert,L.M.J., 范世亨) 주교로 전해진다. 그는 조선에 입국한 지 1년이 못 되어 기도서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전에도 한국인이 지은 교리서적과 기도문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당시 한글을 천시하는 풍조 때문에 중국에서 들어온 교리서와 기도문을 한문투 그대로 번역, 저술하여 교도들이 이용하기에 불편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한국말을 대강 익히자, 곧 네 명의 통역을 데리고 남녀노소, 유식 · 무식을 막론하고 누구나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기도문을 번역하게 되었다.
원본은 파리외방전교회 계통의 ≪천주경과 天主經課≫로 하였는데, 이는 중국 쓰촨교구(四川敎區)의 선교사이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예(Moye,J.M.) 신부가 1780년( 정조 4)경에 저술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예수회 계통 공과인 디아즈(Diaz) 신부의 『수진일과 袖珍日課』에 비하여 무엇보다도 평이하고 대중적인 것이 특징이었다.
앵베르 주교는 모예 신부와 같은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이었고, 모예가 활약한 같은 교구에서 12년간이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유 · 무식에 관계없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기도문을 만들기에는 모예의 ≪천주경과≫가 보다 더 적절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앵베르 주교 당시 전해지던 기도문들은 거의 ≪수진일과≫에서 택한 것들이었다. ≪수진일과≫는 ≪쳔쥬셩교일과≫ 또는 ≪셩교일과≫로도 불렸는데, 1801년( 순조 1)의 기록에서 이 기도서의 상당부분이 이미 번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주성교공과』는 몇 개의 기도문을 제외하면 ≪천주경과≫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구조면에서는 오히려 교회력(敎會曆)을 따르고 있는 ≪수진일과≫를 모방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찬미경 중에는 ≪천주경과≫의 것을 버리고 ≪수진일과≫의 것을 초역한 것도 보인다. 앵베르 주교가 순교한 뒤에도 기도서의 보완작업이 계속되었다. 특히 최양업(崔良業) 신부, 다블뤼(Daveluy,M.N.A.) 주교, 베르뇌(Berneux,S.F.) 주교 등이 참여하였다.
간행은 우선 필사본으로 신자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고, 1861년에 서울에 두 개의 목판인쇄소가 시설되면서 1862∼1864년(고종 1)에 4권 4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그 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의 결과 1972년에 새로운 기도서가 나오기까지 이 책은 수없이 판을 거듭하였다. 초기에 간행된 것만을 보더라도 1878년 2판(4권 4책), 1881년 3판(일본 橫濱, 단권), 1886년 4판(4권 4책), 1895년 5판(단권), 1917년 6판이 나왔다.
판이 거듭되면서 새로운 기도문들이 추가되기는 하여도, 근본적으로 큰 변화 없이 제2차바티칸공의회 이후 기도서의 개혁이 실현되기까지 140여 년간 한국교회의 공식기도서로서 지속되었다.
이 기도서는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 신자들의 신앙을 보존하고 심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로는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한 신앙의 활력소로서 한국교회 발전의 원동력 구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