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4.9m. 석탑은 계룡산 삼불봉 오른쪽의 해발 590m 쯤되는 능선에 자리한 절터에 서 있다. 이 절터에서는 ‘청량사(淸凉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막새 기와가 발견되어청량사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기와는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절터에는 청량사지 오층석탑과 청량사지 칠층석탑(보물, 1998년 지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두 탑과 관련하여 남매의 전설이 전해오기 때문에, ‘오누이탑’, ‘오뉘탑’, ‘남매탑’이라고도 부른다. 현재까지도 대체로 ‘계룡산 오누이탑’, ‘계룡산 오뉘탑’으로 불린다. 1950년대에 도굴꾼들에 의해서 무너졌지만, 1961년에 지금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석탑 옆에는 동학사 암자인 상원암이 자리잡고 있다.
이 석탑은 단층 받침돌 위에 5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리고서 상륜부를 장식한 일반적인 석탑이다. 다만 각 부재의 결구(結構) 방법과 돌을 다룬 방법 등이 특이하여 주목받고 있다. 4장의 돌로 조립한 바닥돌 위에는 역시 4장의 돌로 구성한 아래받침돌이 있다. 그 위에는 모서리 기둥과 면석을 각각 다른 돌로 결구한 받침돌의 면석이 놓여 있으며, 받침돌의 덮개돌은 1장의 널돌로 덮었는데, 밑면의 부연(副椽)이나 윗면의 굄대 등을 포함하여 아무런 장식도 새기지 않았다.
1층 몸돌은 모서리 기둥과 면석을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였다. 몸돌 위에도 각각 다른 돌로 2단의 지붕돌 밑면 받침을 두었는데, 아랫단 받침의 끝부분은 직각으로 꺾였지만, 윗단 받침은 가운데 부분에서 끝부분까지를 안쪽으로 비스듬히 깎고 다듬은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이나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의 지붕돌 밑면 받침을 따른 것이어서 주목된다. 6장의 돌로 조립한 1층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이며, 받침에 비해서 밖으로 뻗은 처마가 짧아 보인다. 윗면에는 2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굄이 있다.
2층 몸돌 역시 1층 몸돌처럼 모서리 기둥과 면석이 다른 돌로 조성되었으며, 몸돌 위에는 1층 몸돌처럼 다른 돌로 이루어진 2단의 지붕돌 밑면 받침이 있다. 4장의 돌로 조립된 2층 지붕돌도 결구 방법은 1층 지붕돌과 같다. 2층 지붕돌 윗면에는 3층 몸돌의 굄이 있고, 3층 몸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면석에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다. 3층 지붕돌의 밑면 받침도 1층과 2층 지붕돌의 밑면 받침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나의 돌로 구성된 지붕돌의 조성 수법 역시 1층과 2층 지붕돌과 같다.
하나의 돌인 4층 몸돌은 3층 지붕돌 윗면의 굄 위에 올려져 있는데, 면석마다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다. 4층 지붕돌 밑면 받침은 1∼3층 지붕돌의 그것과 달리 1단의 다른 돌을 올렸는데, 가운데 부분에서 끝부분에 이르러 안쪽으로 경사지게 깎아 다듬었다. 4층 지붕돌은 1장의 돌을 올렸고, 조성 수법은 역시 아래층 지붕돌과 같다. 4층 지붕돌 위에는 5층 몸돌만 있고, 그 위에는 상륜부의 노반과 함께 보주처럼 생긴 부재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인 조성 수법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부터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으로 이어진 백제계 석탑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위로 올라갈수록 부재가 생략되거나 세부 수법이 가지런하지 않아, 고려 중기의 조형적 수법도 잘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