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기.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발견 당시 이 비는 속칭 산직마을의 공동우물터에서 빨랫돌로 사용되던 것을 주민의 신고로 충북대학교와 충청북도가 조사하였다.
도살용 깔판으로도 사용되어 도끼자국 등에 의해 패인 곳이 많다. 현재 비의 밑부분만이 남아 있으며, 그나마 마멸된 곳이 많아 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남아 있는 부분은 높이 92cm, 너비 91cm, 두께 15∼20cm이다. 원비의 너비가 현재 남아 있는 비편의 너비 그대로라면, 원비의 높이는 2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원래는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명문(銘文)은 정자(正字)로 음각했는데 보존 상태가 매우 나쁘다. 본래 주위에 장곽선을 두른 흔적이 보이나, 정간(井間)을 친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원래 비문에 몇 자가 씌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삼면에 1만 글자가 보이며, 약 160자 정도가 판독된다. 비문의 내용은 불법(佛法)을 찬양하고, 왕의 덕과 전쟁의 참화가 끝나고 삼국이 통일된 것에 대해 칭송하고, 영토의 확장과 국태안민(國泰安民)을 기원하는 것이다.
내용 가운데 유(儒) · 불(佛)에 관한 요소가 다 들어 있어 신라 중대 왕실의 사상정책은 불교로 하여금 유학을 포용하는 정책이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비문의 중간에 '수공2년세차병술(壽拱二年歲次丙戌)'이란 간지가 잇는 것으로 보와, 비의 건립연대는 수공 2년이 686년(신문왕 6)인 듯하다.
그리고 비의 성격은 비문의 마멸이 심하고 보존 상태가 나빠서 전체 내용을 판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보이는 글자로만 볼 때, 불전(佛典)의 구절, 승려의 이름, 기타 불교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또한, 국왕에 대한 축수(祝壽), 영역(領域)의 확대 등에 대한 문구와, 무엇보다도 연대표시 아래 사찰의 건축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 통일기의 사적비(寺蹟碑)로 판단된다.
이 비는 체제면에서 비의 형식과 문장이 삼국시대에 세워진 비석들과 달리 중국의 것을 따르고 있는 등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