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년(흥덕왕 3)에 설치되었다가 851년(문성왕 13)에 철폐되었다. 완도는 당시 신라와 당나라 · 일본을 잇는 해상교통로의 요지였다.
당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교통로로는, 첫째 중국산둥 반도[山東半島]에서 황해안을 건너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연안을 돌아서 압록강 하구나 그 남쪽의 연안지역으로 이르는 항로, 둘째 산둥 반도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강화도나 덕물도에 이르러 연안 각 하구로 통했던 항로가 있었다.
셋째로는, 중국의 양쯔강[揚子江] 하구와 주변지역의 명주(明州) · 양주(楊州) 등지의 동북에서 황해를 건너오거나, 또는 산둥 성 등주(登州)에서 동남으로 순항하여 흑산도 근해에 이르러 다시 한반도 연안의 각 포구로 항행하거나, 더 나아가 대한해협을 거쳐 일본 서부지역에 도달하는 항로가 있었다.
이 중 첫째는 주로 당나라와 발해 간의 교통로였고, 둘째 · 셋째가 신라인들이 많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특히, 셋째는 신라 · 당나라 · 일본의 3국을 잇는 가장 중심이 되는 해상로였다. 완도는 이 세번째 항로의 길목을 누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는 동안 당나라 지방군벌의 상황과 당시의 국제무역에 대해 깊은 의식을 갖게 된 장보고는 이 완도의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여기에 해군기지이자 무역 거점이 될 수 있는 청해진을 건설하였다. 그 위치는 지금의 완도읍 장좌리와 죽청리 일대에 해당된다.
이곳은 삼면의 조망이 확 트이고 수심이 깊어 선박을 대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태풍을 피할 수도 있는 자연적 요새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청해진의 군영본거지는 완도읍 장좌리 앞의 장군섬[將島]이다. 이곳의 중앙에는 망대가 있어 멀리 남해안 일대와 해남 · 강진을 지나 당나라의 산둥 반도로 출입하는 해로를 감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장군섬의 둘레에는 10㎝ 간격으로 목책(木柵)을 박아 외부선박의 접근을 막도록 하였으며, 장군섬 자체를 외성과 내성으로 나누고 3중으로 축성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이러한 청해진의 건설은 장보고가 왕에게 청을 올려 그 승인하에 스스로 지방주민들을 규합하고 조직하여 이룩한 것이다.
따라서, 청해진은 그 출발에서부터 다분히 장보고 개인을 중심으로 한 독자성이 강하였다. 신라조정이 장보고에게 내린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직함도 신라 관직체계에는 없는 별도의 것이었다. 청해진을 거점으로 하여 장보고는 황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한 뒤, 국제무역을 활발히 벌였다.
당나라에 교관선(交關船)을 보내 교역하였고,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의 인솔하에 상선단을 보내 무역하였다. 당시 일본과 당나라를 잇는 국제항로는 장보고의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었다. 그에 따라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계기지로서 그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많은 수의 유민들과 골품제의 질곡하에서 입신의 길이 막혔던 유능한 인재들이 청해진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휘하에 1만 명 이상의 군졸을 거느렸고, 상선단도 소유하고 있었다. 청해진은 독자성을 띤 하나의 지방세력으로 되어갔다.
836년(희강왕 1) 수도에서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일파가 장보고에게 의탁해옴에 따라, 청해진은 신라의 정국을 결정하는 주요한 정치무대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838년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는 정변이 발생하자, 청해진에 있던 김우징 일파가 장보고 예하부대의 지원을 받아 경주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승리한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하면서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고, 이에 중앙귀족들은 위협을 느꼈다. 마침내 딸의 왕비책봉문제를 둘러싸고 장보고와 중앙정부 간에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중앙정부는 청해진 세력이 강대하여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못하고, 846년 자객 염장(閻長)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장보고의 죽음은 청해진 세력에 일대 타격이 되었으나, 그의 자제와 부장 이창진(李昌珍)의 주도하에 세력을 수습, 일본에 상선단을 보내는 등 해외무역을 계속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염장 등이 이끈 토벌군의 공격을 받아 마침내 청해진이 함락되었다. 염장은 이창진 등에 의해 파견되었던 무역선과 회역사의 반송을 일본에 요구하는 등 청해진에서 잔여세력의 소탕에 주력하였다.
나아가 중앙정부는 저항적인 이 지역의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851년에 청해진을 파하고 그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에 청해진은 해군기지로서, 그리고 무역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청해진은 사실상 장보고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