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경우에는 14세기 초엽경에 본격적으로 생산되었으나, 우리 나라에는 14세기 말엽에 전래되어 생산단계에 들어간 것은 15세기 중엽경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15세기 중엽경의 초기 청화백자는 기형(器形)과 문양이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을 짙게 보이지만, 15세기 후반경에는 독자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그 예로는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1489년(성종 20) 작품인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국보, 1974년 지정)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작품의 제작은 1467년(세조 13) 도자기 제조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옹방(司饔房)이 사옹원(司饔院)으로 개칭되어 그 기구가 확대되면서 경기도 광주시 일대가 사옹원의 분원(分院)으로서의 성격이 뚜렷하여지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청화안료는 회회청(回回靑)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중국에서 수입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63년부터 1469년(예종 1) 사이에는 수입이 어려워 국내산 토청(土靑)을 채취하여 청화백자를 번조하였다. 성종 초에는 다시 회회청이 수입되는데, 현존하는 유물로는 토청과 회회청의 차이를 분명히 구별할 수 없다.
다만 화학분석 결과에 따르면 코발트에 비소(As)를 함유한 것이 회회청이며, 철분과 망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이 토청이다. 철분의 함유가 많으면 암흑색을 띠고, 망간의 함유가 많으면 회자색을 나타내므로 육안으로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할 뿐이다.
청화백자의 회화적인 문양에서는 일반 도공의 솜씨가 아닌 도화서 화원의 전문화가의 그림솜씨를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관장제(官匠制) 수공업체제로 자리잡아 가는 광주분원의 소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시기의 가마터로는 광주의 번천리·도마리·우산리·무갑리·학동리 등의 가마터가 있는데, 이들 가마터가 관요라는 사실을 뒷받침하여 주는 것이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慵齋叢話≫와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도 광주목토산조의 ‘每歲司饔院官率畫員 監造御用之器(매세사옹원관솔화원 감조어용지기)’라는 기록이다. 따라서 청화백자의 회화적인 문양은 조선시대 화단의 화풍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고, 제작 연대 추정에도 상호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15세기에서 16세기 전반경의 문양으로는 송문(松文)의 타지기법(拖枝技法)에서 마하파화풍(馬夏派畫風)과 관련되는 문양을 볼 수 있는 반면, 16세기 후반으로부터 17세기에 이르면 조선 중기의 화단을 풍미하였던 이른바 절파화풍(浙派畫風)의 문양이 청화백자호에도 나타난다.
그 예가 이화여자대학교 소장의 청화백자송죽인물문호(靑畫白磁松竹人物文壺)로서, 형태는 청화백자홍치이년명송죽문호와 매우 비슷하나, 절파화풍을 보이는 문양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16, 17세기에 해당되는 광주분원의 가마터로부터는 청화백자 도편(陶片)의 수집이 극히 드물고, 또한 편년에 기준이 되는 절대자료도 없어서 그 특징을 규정짓기가 어려우나, 1640∼1649년에 해당되는 광주 선동리 가마터에서는 간간이 ‘祭(제)’자만이 들어 있는 청화백자 접시파편이 수집되고 있다.
18세기 전반기에 해당되는 금사리 가마터에서는 매우 특색 있는 청화백자가 상당수 제작되고 있다. 이를테면 형태로는 각병(角甁)·제기(祭器)의 각이 진 굽다리 등 새로운 제작기법이 나타나며, 문양은 간략한 야초(野草)·초충(草蟲)과 산수화 등의 한국적인 정취를 보이는 소재가 등장한다.
10년에 한 번씩 옮겨다니던 분원이 1751년(영조 27) 지금의 남종면 분원리로 분원의 위치가 고정되어 1882년(고종 19) 민영화될 때까지 약 130년간은 한 곳에서만 요업활동을 하였으며, 이 때에 청화백자의 대량생산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분원리 시대 전반은 금사리 청화백자와 통하며 간략한 문양이 장식되지만, 분원리 후반은 대중화되어 민화풍(民畫風)의 문양이 뚜렷이 나타난다. 청화는 진사(辰砂)·철사(鐵砂)와 동시에 시문되는 예도 있으며, 분원리요 시기에는 문방구류에서 그 특징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