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석 ()

근대사
인물
개항기 훈련원 첨정, 농무목축시험장 관리책임자 등을 역임한 무신. 농업기술자.
이칭
미산(微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886년(고종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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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개항기 훈련원 첨정, 농무목축시험장 관리책임자 등을 역임한 무신. 농업기술자.
생애 및 활동사항

일명 도민(道敏). 호는 미산(微山). 오위장(五衛將)을 비롯해 여러 무관직을 거쳤다. 무관직에서 일시 퇴직하였다가 1883년(고종 20) 5월 훈련원 주부로 복직하였다.

같은 해 6월 최초의 견미(遣美) 사절인 보빙사(報聘使) 민영익(閔泳翊)의 종사관에 임명되면서,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관계도 함께 받았다. 9, 10월 두 달간 민영익을 수행해 미국을 방문, 주요 도시를 돌면서 공공기관과 각종 공장을 시찰하였다.

특히 미국의 농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스턴시의 박람회에 참가해 진열 중인 각종 농기구를 보고는 구입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왈콧(Walcott, J. W.) 모범농장을 보고 나서는 한국농업에도 이러한 시험장(試驗場)이 필요하다고 느껴 보빙사 일행과 함께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하였다.

워싱턴에 가서 미국 농무성으로부터 각종 농작물 종자를 입수하였다. 이때 민영익은 미국 국무장관에게 농업기술자의 조선 파견을 요청해 응낙을 받아냈다. 또, 뉴욕에 가서 미국 상인과 농기구 구입 계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인 1884년 초 훈련원 첨정(僉正)에 임명되어 왕으로부터 광대한 토지와 재정적 뒷받침을 받아 서울 망우리 부근에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蓄試驗場)을 설치, 관리 책임을 맡았다. 1884년 봄 미국에서 계약한 농기구가 도착, 시험장은 활기를 띠었다. 농무목축시험장에 미국산 및 재래종자로 각종 농작물과 야채·과수를 심어 대풍작을 거두었다.

이에 농작물 재배법과 사용법을 소개하는 해설서를 첨부해 수확물의 종자를 지방군현 305개소에 송부, 그 재배를 권장하였다. 농작물 개량뿐만 아니라 가축의 개량도 시도하였다. 버터와 치즈 생산계획도 아울러 수립해 미국에 가축을 주문하였다. 또한 왕으로부터 둘레 약 8리의 땅을 하사받아 목장 건립에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였다.

1885년 미국에서 소·말·양·돼지 등이 도착하자 가축 개량에 착수하였다. 이 해 역시 사업은 성공적이어서 수확한 다량의 야채류를 궁중과 외국인 거주자들에게 분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던 중 1886년 갑자기 병사하였다.

농무목축시험장 사업은 최경석이 죽은 뒤 미국이 약속한 농업기술자를 파견하지 않아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한국 농업 및 목축업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한미오십년사』(문일평, 탐구당, 1975)
『한국개화사연구』(이광린, 일조각, 1974)
『한국개화당연구』(이광린, 일조각,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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