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최일(崔日). 호는 긍허(兢虛). 황해도 안악 출신.
1904년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안악에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안악에서 최광옥(崔光玉)과 더불어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해 청년들의 계몽사업과 함께 산업의 증진, 교육의 장려를 목적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면학회 주관으로 여름마다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에 하기사범강습소를 개설해 교원 양성에 힘썼다. 해서교육총회·연합운동회 등을 열어 신교육과 애국정신·단결정신을 함양하는 데 힘썼다. 이때 같이 참여해 활약한 사람들로 김구(金九)·최광옥·김홍량(金鴻亮)·노백린(盧伯麟) 등이 있다.
1907년 9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회원들의 협조 아래 사업을 더욱 확대하였다. 김용제(金庸濟) 등과 더불어 면학서포(勉學書舖)를 설치하고, 1908년에는 최광옥이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법서인 『대한문전(大韓文典)』 등을 발행하였다.
1909년 신민회의 방계 사업으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고, 각 지방에 분회를 설치해 청년들의 수양·훈련에 노력하였다.
신민회가 만주에 독립군 기지 건설 계획을 추진하는 것과 병행해, 1909년 10월 안악 지방의 김용제·최광옥과의 협의 끝에 현지답사 차 압록강을 건너 본계현(本溪縣)·환인현(桓仁縣)·집안현(輯安縣) 등지를 둘러보고 귀국하였다.
1910년 안명근(安明根)의 체포로 인한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19년 3·1운동 뒤에는 김구와 함께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연통제(聯通制) 조직을 위해 다시 국내로 잠입해 독립 군자금 모집과 『독립신문』 등의 문서 배포, 독립사상 고취, 독립군의 국내진격시 호응 등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 조직에 일을 하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국내로 들어와서 조직 확대·군자금 모집·선전공작 등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23년 만주 길림(吉林)으로 이주해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 재무를 담당하였다.
1927년에는 길림에 온 안창호를 맞아 자신이 경영하는 정미공장 대동공사(大東公司)에서 연설회를 개최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귀국 당해 거주제한조처를 당하였다.
1943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광복을 맞은 뒤 임시정부 동북대표부(東北代表部) 주석에 임명되어 교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활동하였다. 다음해 동북한국교민회연합회(東北韓國僑民會聯合會)를 조직해 부회장이 되었으며,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동북특별당부의 특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8년 중국이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교포 수천 명을 인솔해 톈진[天津]을 경유, 귀국하였다. 1949년 한국독립당 중앙당부 당원으로 남북협상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에는 신익희(申翼熙)의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에 입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1950년 이후 민주당 진해시 당부 고문으로 반독재운동을 전개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