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소요재(逍遙齋)·사숙재(私淑齋). 최우보(崔雨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승흡(崔承洽)이고, 아버지는 오위사정(五衛司正) 최중생(崔仲生)이며, 어머니는 안선복(安善福)의 딸이다.
1461년(세조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2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한 뒤 사관(史官)으로 발탁되었다. 1464년 문풍진흥을 위한 본관(本官)으로서 예문관직을 겸비하고 유학을 습업(習業)하게 한 겸예문직의 운영과 함께 겸예문직에 제수되고 사학문(史學門)에 배속되었다.
1466년 문과중시에 3등, 계속해서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의 혜택을 입었다.
1470년(성종 1) 형조좌랑·경연시독관에 개수(改授)되면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고, 실록편수가 끝난 뒤 1계(階)가 가자(加資)되었다.
1472년 사헌부지평, 이후 예문관교리·경연시독관·경연시강관 등을 역임하고, 1476년 12월에 찬진(撰進)된 『삼국사절요』의 편찬에 예문관부응교로서 참여하였다. 1477년 예문관직제학·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이듬해 찬진된 『동문선』의 편집에 참여하고, 같은 해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여주목사(驪州牧使)로 파견되었다.
1479년 “두량(斗量)을 부정하게 사용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그 이듬해 홍문관부제학으로 복직되었다. 일세의 명현이었다는 평판과 높은 시격(詩格)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저서로는 1813년(순조 13)에 간행된 『소요재집』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