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화(江華). 고려 공민왕 초에 의릉직(毅陵直)에 제수, 이후 감찰규정(監察糾正)·계림부판관(鷄林府判官)·이성등처관군만호(泥城等處管軍萬戶) 등을 역임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전라도체복사(全羅道體覆使)로 파견되어 민심을 위유하고, 같은 해 7월 환경하여 신돈(辛旽)을 먼저 본 뒤에 왕을 알현하여 장형(杖刑)을 받았고, 고려 말에 공조전서를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회례사(回禮使)로 일본 구주(九州)에 파견되어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이미카와(令州了俊)에게 왜구를 토벌하여 양국의 우호를 도모하자는 국서를 전하고, 이마카와가 차견(差遣)한 승려 종구(宗俱)와 함께 피로인 570여 명을 대동하고 귀국하였다.
1397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1398년 강원도도관찰사를 지냈다. 1400년(정종 2) 3군 도진무(都鎭撫)로 재직 중 방간(芳幹)의 모반에 연좌되어 하옥되었다가 방면되고, 곧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에 좌천되었으며, 곧 방간의 당여로 재차 논죄되어 삭직, 장형을 받았으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사면되었다.
1403년(태종 3) 승녕부윤(承寧府尹)으로 복직되고, 그 해 좌군총제(左軍總制)에 개수(改授)되고, 그 뒤 안동부사·개성부유후 등을 역임하였다. 1413년 형조판서로 한성부윤 김겸(金謙)과 함께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그 해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14년 판한성부사가 되고, 이듬해 전라도의 조운책(漕運策)을 진언(陳言)하였다. 성품이 청백하면서도 절개가 굳고, 언행이 정중하였다. 일찍이 명나라에 들어가 옥하관(玉河館)의 건축을 감독하고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시호는 제정(齊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