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언보(彦甫). 최계운(崔繼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첨로(崔添老)이고, 아버지는 최문손(崔文孫)이며, 어머니는 이은(李垠)의 딸이다. 장인은 조육(趙育)이다.
1444년(세종 26)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郞)을 거쳐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이 되고, 1454년(단종 2) 직강으로서 기주관(記注官)이 되어 『세종실록』의 수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4월 호조정랑(戶曹正郞) 재직 중에 몰수한 최습(崔濕)의 가산을 월권으로 나눠 지급한 일로 자자(刺字)한 후 장리안(藏吏案)에 올리고 태장(笞杖)에 처해야 한다고 논죄되었으나 집정인 세조의 배려로 현직을 유지하고 태장도 수속(收贖: 죄인의 속전을 거둠.)함에 그쳤다.
1455년(세조 1) 호조정랑으로서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기생을 간통하고 첩으로 삼은 일로 파직되었다. 1459년 이전에 복직되고, 이듬해 당상관에 오르면서 사간원우사간대부(司諫院右司諫大夫)에 제수되었다. 이어 좌사간대부·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1462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첨지중추부사로 입조하고, 1464년(세조 10) 동지중추부사의 가함(假銜: 외교사절로 파견될 경우 임시로 한 직급 높은 관직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일)을 띠고 진위진향사(陳慰進香使)인 이조참판 신후갑(愼後甲)의 부사(副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 오고, 같은 해 이조참의로 옮겼으며, 대사성을 역임한 뒤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