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간(迊干)의 관등으로서 금관고성(金官高城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을 공격하여 취하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 때 아간(阿干) 영규(英規)라는 자가 충지의 위세를 빌려 수로왕릉(首露王陵)의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내던 중 단오에 향사(享祀)를 지내다가 우연히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 죽었다.
이에 충지는 놀랍고 두려워 3척(尺) 비단에 수로왕의 진영을 그려서 벽상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밝혀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 3일이 지나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땅 위에 고이니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충지는 더욱 두려워 그 진영을 내려 밖으로 나가 불태우고 수로왕의 후손 규림(圭林)을 불러 종전대로 왕의 후손인 그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충지는 907∼911년(효공왕 11∼15)경 이전의 김해지방의 최고지배자였던 소율희(蘇律熙)였고, 또 위의 일은 수로왕에 대한 제사를 둘러싼 전통적인 주제권자(主祭權者)인 수로왕의 후손과 그 주제권을 탈취하려는 쪽과의 분규 사실이 일부 설화화된 기록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