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관련된 산신기원설화가 ≪삼국유사≫ 권1 ‘내물왕 김제상(奈勿王金堤上)’조에 전한다.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김제상(金堤上,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으로 되어 있음.)이 왜국에 인질로 잡혀 간 왕자 미해(美海)를 찾아 왜국으로 갔다가 왕자는 돌려보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자신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붙잡혀, 갖은 악형을 당하던 끝에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처음에 제상이 고국을 떠날 때 그 아내가 소식을 듣고 남편의 뒤를 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드러누워 울부짖었다. 그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붙들고 집으로 돌아오려 하였는데,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 지명을 벌지지(伐知旨)라 하였다.
그 후에도 부인은 남편을 그리는 심정을 견디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신모(?述神母)가 되었는데, 아직도 부인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신모 이야기와 비교가 되는 자료로는 ≪삼국유사≫ 권5의 선도신모〔仙桃山聖母〕이야기가 있다. 양 신모담의 성립 기반을 비교해 보면 치술신모담이 산신제의 기원설화로 성립되었을 것으로 여겨짐에 비하여, 선도신모담은 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서 후에 불교적 신앙이 융성해짐에 따라 도불 혼합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하여튼 두 이야기 모두 산신이 여신으로 되어 있다든가, 또 ‘치술(?述)’이란 단어가 ‘소리개’를 의미하는 한편 선도신모담에서도 신모의 부친인 중국 황제가 솔개의 발에 편지를 매어 보내며 신모에게, “소리개가 머무는 곳을 따라가 터를 삼아라.”라고 했다는 것을 보면, 두 이야기의 성립에는 민속적인 공동 기반이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