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253호. 배천의 진산(鎭山)인 치악산(雉嶽山 360.7m)의 정상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산봉을 돌아 동남향한 계곡을 에워싸 둘레가 약 3.6㎞이다.
성의 북쪽으로는 하다리천의 지류가 본류와 만나 서남쪽으로 예성강에 들어가고, 동쪽에서는 예성강이 연백평야를 휘감아 남쪽으로 바다에 흘러드는 중앙에 높이 솟은 산의 형세를 이용하였다.
예성강을 통한 수로와 육지를 잇는 육로의 수륙교통이 교착되는 곳으로, 북쪽으로는 평산(平山), 동쪽으로는 강음(江陰)과 개성, 서쪽으로는 연안(延安)과 통한다.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어 조선 초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치양성(雉壤城)’이라고도 한다.
성벽은 산의 정상에서 남향한 능선과 남동향한 능선을 타고 내려와서, 각각 능선의 선단부(先端部)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어 계곡을 가로지르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산성)으로,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서쪽 성벽의 잘 보존된 곳은 성벽 아래쪽의 너비가 8m, 위쪽의 너비가 5m이고, 성벽의 높이는 바깥에서 3.5m, 안쪽에서 1.5m여서 위쪽은 내외협축(內外夾築 :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는 것)되었다. 기초 부분에서는 한 단씩 뒤물림하여 쌓아 굽도리 계단식을 이루고, 위쪽으로는 곧추 쌓았다.
문터는 남쪽과 서쪽, 북쪽에 있으나 허물어졌다. 남문터는 계곡물이 빠지는 곳의 동쪽에 있고 장대석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문의 남쪽 10∼30m에 큰 성돌이 있어서 문길에 돌을 깔고 외곽에 옹성을 마련했다고 여겨진다.
서문과 북문은 봉우리 사이의 안부(鞍部)에서 성 아래의 마을로 통하는 곳에 있는데, 북문은 초석과 문구(門口)의 측벽이 있어 너비 6m임을 알 수 있다. 계곡물이 빠지는 수구는 남문터 남쪽 10m지점에 있다. 성안의 작은 골짜기 세 곳의 물이 모두 모여든 다음 수구로 배수되며, 자연암반을 기초하였다.
성벽의 요소마다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을 설치하였는데, 동벽에 4개, 서벽에 4개, 북벽에 3개로 모두 11개에, 성벽이 꺾이는 부분을 이용하였다. 장대는 산의 정상부에 평탄대지를 마련한 곳으로 여겨지고 고구려시기의 기와조각이 발견된다. 성안에는 조선시대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을 지었다.
이 성은 고구려와 백제가 서기 494년에 싸웠다는 치양성에 비정되고 있으며, 5세기 후반에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있었던 요새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까지 사용된 후 조선시기에 이르러 폐허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