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봄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조선일보사의 후원으로 개최한 전조선명가수선발음악대회에서 23세의 고복수가 2등으로 입상하였다.
그는 몇 달 뒤 오케레코드사에 발탁되어 자기보다 두 살 아래인 청년 가요작곡가 손목인의 처녀작품 「타향살이」를 첫 취입하였다. 느린 3박자의 서정가요(단조 구성)로, 가요형식의 원형인 AㆍB형식의 16소절로 된 짧은 노래이다. 가사의 1절은 다음과 같다.
타향살이 몇 해런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고복수의 구수한 목소리와 별로 기교가 없는 순수한 창법이 대중들의 호감을 샀는지「타향살이」는 고복수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하였다. 만주로 이민 가서 사는 동포들에게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의 노래, 즉 망향가처럼 불리었다.
그는 계속해서 손목인의 작품인「사막의 한(恨)」 · 「짝사랑」 · 「휘파람」등을 불러 1935년 이후 정상급 가수로 각광을 받았다. 고복수는 연하의 손목인을 일생동안 스승으로 모시는 정성과 예의를 잊지 않았다. 이 노래는 곡은 짧으나 가사는 4절까지 있는 드문 가요곡이기도 하다.
울산에 세워진 고복수 노래비에는 「타향살이」 가사가 새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