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명은 각지(覺地)·무불(無不). 1880년대초 개화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던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百潭寺) 소속의 승려이다.
1880년경에 서울의 유홍기(劉鴻基)·김옥균(金玉均) 등과 접촉한 뒤 개화당의 일원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일본에 밀항하여 동경(東京)의 혼간사[本願寺] 소속 센소[淺草別院]에 기숙하면서 메이지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을 목도한 뒤 그 해 6월에 귀국하였다. 11월에 국왕의 밀명으로 개화당의 일원이며 승려인 이동인(李東仁)과 함께 도일, 주일청국공사 허루챵(何如璋)과 연미사(聯美事)를 논의한 뒤 12월에 귀국하였다. 1883년 6월 김옥균의 수원(隨員)으로 일본을 방문한 다음해 2월에 고베[神戶]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