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거대한 바위의 동면(東面)에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삼존불입상을 새겼다. 중앙에 본존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 배치와 달리, 중앙에 보살,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더욱이 좌우의 불상은 큼직하고 중앙의 보살은 상대적으로 작아 1보살(一菩薩)·2여래(二如來)라고 하는 파격적인 배치와 함께 특이한 구도를 보여 주고 있다.
좌우의 불상은 기본적인 형태가 같다. 다만 오른쪽 불상의 얼굴이 뚜렷하고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두 손의 인상(印相)이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한 모습이 약간 다를 뿐이다.
왼쪽 불상은 소발(素髮)의 머리에 팽이 모양의 육계(肉髻)가 표현된 것이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과 비슷하다. 그래서 얼굴의 기본 골격과 함께 같은 백제불의 전통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은 살이 붙어 양감이 있는 데다 근육이 팽창되어 강건한 인상을 보여 준다. 가는 눈, 꽉 다문 입과 보조개, 큼직한 코 팽창된 뺨과 함께 만면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고졸하고 장중한 인상을 풍긴다. 신체 역시 장대하여 얼굴과 잘 조화되어 있다. 하지만 얼굴은 신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아서 서로 대비된다.
이러한 점이 중국의 북제(北齊) 불상 내지 수(隋) 불상의 장대한 양식 계열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좀 더 위풍당당한 점에서 부처의 위엄을 명쾌하게 표현하였다.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도 두껍고 힘 있게 처리되었으며, 앞자락이나 두 팔에 걸쳐 내린 옷자락도 묵직하게 표현되어 부처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두 손은 가슴 부근에 평행되게 모아 오른손은 손바닥을 보이면서 손가락을 굽히고 왼손은 보주(寶珠)를 살짝 잡고 있다. 능숙한 기량에는 미치지 못하는 고졸성(古拙性)을 보여 준다. 띠 매듭은 전 황룡사 금동불입상(傳 皇龍寺 金銅佛立像)의 것과 함께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 불상의 형식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중앙의 보살은 기본적으로는 좌우 두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이 점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1962년 지정)의 오른쪽 협시보살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능숙한 기량과 세련된 아름다움까지는 진행되지 못한 것 같다.
묻혀 있었는 대좌는 들어낸 결과,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 홑잎의 연꽃잎무늬)로 날카롭고 분명한 연꽃을 표현하고 있어 백제 연꽃무늬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큰 바위에 삼존을 조각하고 여기에 목조전실(木造前室)을 조영하였던 일종의 마애석굴사원 내의 불상이다. 북위(北魏) 말 이래 중국의 산둥 지역에서 유행하던 마애석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생각된다. 또한 양식상으로는 중국 북제불 양식 계통을 따르고 있어 제작 연대는 7세기 초로 볼 수 있다. 지역적으로도 당시 삼국시대에 중국과의 교역에서 교두보 구실을 하였던 태안반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새로운 석굴사원 양식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