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금·은·동·옥 등으로 된 고리 모양의 것이지만 원시사회에서는 조개 껍데기를 갈아 만들거나 흙을 빚어 만들었고, 삼국시대에는 유리로 만들기도 하였으며, 고려시대의 것에는 적칠도동제(赤漆塗銅製) 팔찌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팔찌를 사용하였는데, 서포항유적(西浦項遺跡)·웅기송평동패총유적(雄基松坪洞貝塚遺跡) 등에서는 조개 껍데기의 가운데 부분을 깬 다음 갈아서 고리로 만든 조가비팔찌가 출토되었고, 서포항유적에서는 대리석제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청동제·옥제 등으로 다양해졌는데, 창호리 세곡의 토광묘에서는 청동판을 감아서 만든 청동팔찌가 나왔고, 회령연대봉토광묘유적(會寧煙臺峰土壙墓遺跡)에서는 마노(瑪瑙)팔찌가 발견되었으며, 무산호곡 주거지에서는 고리가 달린 연옥(軟玉) 팔찌가 출토되었다.
또 초기철기시대의 영천 어은동유적에서는 청동팔찌 8개가 발견된 바 있고, 마산성산패총에서도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재료·장식 등이 다양해지며 유품의 예도 많아진다. 고구려의 팔찌로는 청동제와 은제가 알려졌는데, 청동팔찌인 대성산식물원구역제4호분(大聖山植物園區域第四號墳) 출토품은 단면이 원형이고 청동쇠줄로 둥글게 만든 것이고, 만달산록제15호분(晩達山麓第十五號墳)의 것은 표면 둘레에 톱니 같은 돌기를 장식하였다.
은팔찌인 용강군 후산리추동제9호분의 것은 단면이 원형이고 은줄로 간단하게 구부려 만들었고, 후산리내동제4호분 것은 단면이 모를 죽인 구형의 납작한 것으로 정원(正圓)을 이루고 있다.
백제의 팔찌는 금·은·동제가 있으며, 팔목에 낄 수 있을 정도의 고리로 표면에 돌기 장식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팔찌는 명(銘)이 새겨진 유일한 팔찌로서, 안쪽 둘레에 점렬을 두르고 표면에는 용 두 마리를 양각하였으며, 안쪽 면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경자년이월다리작대부인분이백주주이)’라는 음각명이 있다. 또 안으로 곡선을 이룬 가늘고 긴 은봉 3개와 금봉 1개를 연결하여 만든 새로운 형식의 팔찌도 있다.
가야의 팔찌에는 옥·금·은제가 있는데, 양산부부총(梁山夫婦塚)의 옥제팔찌는 마노옥 55개를 꿴 것과 마노옥·유리옥 및 은지(銀紙)에 도금한 옥 등을 줄이어 만든 것이다. 금팔찌에는 표면에 타원형 알을 장식한 것이 있고, 은팔찌에는 표면을 톱니 모양으로 만든 것이 있다.
신라의 팔찌에는 옥·유리·금·은·동제가 있는데, 옥제는 곡옥·관옥·둥근옥·소옥 등을 꿰어 만든 것과 유리옥 28개를 꿴 것 등이 있으며, 서봉총(瑞鳳塚)에서는 아름다운 광택이 나는 녹색 유리 고리로 된 유리팔찌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 금·은·동제의 팔찌는 거의 모두가 고리 표면을 톱니 모양으로 에어서 장식한 것이다. 그리고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는 금판으로 된 고리 표면에 누금세공을 하고 청옥·남색옥 등을 박아 장식한 금팔찌가 출토되었다.
고려시대의 팔찌로는 적칠도동팔찌와 함께 화조당초문, 용문 등을 표현한 도금은팔찌류가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팔찌를 거의 착용하지 않아 남아 있는 유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