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본에서는 의료관계 전문인력이 부족한 실정이었으며,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식민지 한국에서도 의료관계 교육기관의 증설이 요청되었다.
아울러 한국인의 고등교육 기회확대라는 명분도 살릴 수 있다는 취지에서 1920년대 후반기에 서울(당시는 경성)과 대구·평양에 의학강습소 등의 형태로 내려온 의학교육기관을 전문학교로 개편, 승격시켜 개교하였다.
평양의학전문학교도 1929년 4월 수업연한 4년제의 전문학교로서 평양의 남정(南町)에서 개교하여 1933년 3월 제1회 졸업생 60명을 배출하였다. 다른 의학전문학교와 마찬가지로 신입생모집에 있어 한국인과 일본인의 비율은 대체로 2 : 1의 수준에서 정책적으로 조정되었으며, 이러한 추세는 광복이 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식민지 교육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본인의 의학교육이라는 본래의 의도와 한국인의 고등교육 기회확대라는 명분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각급학교의 학생정원은 계속 동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급학교로의 진학기회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평양의학전문학교도 입학경쟁률이 언제나 30 : 1이 될 정도로 치열하였다.
1939년 당시의 통계에 의하면 교수는 28명이었으며 학생은 36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14회졸업생까지 배출되었으며, 1946년 제15회졸업식까지 평양의학전문학교의 명칭과 최초의 한국인 교장 명의로 졸업장이 수여되었다. 이어 평양의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