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씨의 아버지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무(起畝)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이후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1476년 왕비로 책봉되고 이 해 세자 융(㦕 : 뒤의 연산군)을 낳았다.
왕비가 된 뒤 투기가 매우 심해 국모로서 부덕한 일을 자주 일으켰다. 1477년에 비상(砒霜)을 숨겨 왕과 왕 주위의 후궁을 독살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아 빈(嬪)으로 강등되려는 수모를 겪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일로 왕과 모후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격분을 유발해 이 해 여러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비되어 친정으로 쫓겨났다.
폐비된 뒤 바깥세상과의 모든 접촉이 금지되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전에 행한 일들을 뉘우치고 부덕을 쌓는 등 근신하였다.
한편, 1482년 일부 조정 신료들에 의해 세자의 어머니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졌다. 즉,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면서 새로운 정치문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폐비를 미워하는 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정희왕후(貞熹王后)·소혜왕후(昭惠王后)는 여전히 폐비를 혐오했고, 왕의 후궁들인 숙의(淑儀) 엄씨(嚴氏),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폐비를 더욱 모함하였다.
그런데 폐비의 혈육인 세자가 점점 성장하자 인심도 점차 폐비를 동정하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이에 성종은 영돈녕부사 이상 삼정승·육조의 관원 및 대간들을 모아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왕은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사사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묘명도 없이 장단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1489년 세자 즉위 이후를 고려한 왕의 배려로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명명하고 묘지기를 두어 관리하였다.
그리고 이어 장단도호부사가 속절(俗節)마다 제사를 지내게 조처하였다. 1495년(연산군 1)연산군이 생모의 폐비사실을 알게 되면서 신원(伸寃 : 원한을 풀어버림)이 모색되었다. 1497년에 개장(改葬)한 뒤 효사(孝思)라는 묘호(廟號)와 회(懷)라는 묘호(墓號)가 추봉되었다.
1504년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한 무단적 분위기에서 성종의 “폐비의 추숭을 허하지 말라.”는 유교(遺敎)가 무시되면서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묘도 회릉(懷陵)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효사의 묘호도 혜안전(惠安殿)으로 개칭하면서 완전히 신원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다시 관작이 추탈된 뒤 영영 신원되지 못하였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출산한 정궁이면서도 투기심 등 부덕한 행위로 폐비되었다가 참극을 당하였다. 이것이 갑자사화의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연산군이 실정으로 치달아 폐위되는 비극의 촉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