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3책. 활자본.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 만에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중심이 되어 『소대풍요』 이후의 위항시인 333명의 시 723수를 실어 간행하였다.
『풍요속선』 권두에는 당시 대제학이던 홍양호(洪良浩)와 정창순(鄭昌順)·이가환(李家煥)의 서문을 실었다. 말미에는 정이조(丁彝祚)·이시선(李是䥧)·홍의영(洪儀泳)·이덕함(李德涵)의 발문을 실었다.
『소대풍요』가 시체별(詩體別)로 분류하여 한 사람이 여러 번 나뉘어 나타나는 것에 대한 불편을 없애려고 인물중심으로 실었다. 범례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각 시인을 나이순으로 싣고, 성명·자·호·벼슬 등을 표기한 뒤에 그 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곁들였다.
『풍요속선』 권1에는 『소대풍요』의 끝에 첨가되어 있던 습유(拾遺)·별집·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합하여 『풍요속선』의 체재에 맞게 정리하였다.
32명의 시 110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2에는 42명, 권3에는 54명, 권4에는 46명, 권5에는 58명, 권6에는 62명, 권7에는 71명의 시가 실려 있다. 권7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7명과 승려 7명, 여자 11명의 시를 함께 수록하여 위항문학의 개념을 넓히고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를 전하고자 하였다.
『풍요속선』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금체시(今體詩)이다. 위항인들이 당시의 조류를 따라 금체시에 주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 권의 첫머리에는 ‘천수경 편(編)’, ‘장혼(張混) 교(校)’라고 명기하여 천수경이 편집을 맡고 장혼이 교열을 담당하였음을 말하여준다.
이들은 송석원시사의 주동인물로서 대규모 시회(詩會)를 여는 등 위항문학을 절정기에 이르게 하였다. 자신들의 문학에 자부심을 가지는 만큼 자신들의 시가 후세에 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한두 편의 시만 남긴 시인이라도 반드시 수록하였다.
『풍요속선』에 실린 인물들은 중인층이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들 시의 성격도 다양하다. 대다수의 근체시에서는 사대부들의 시와 차이를 느낄 수 없다.
대부분 자연경관을 읊거나 다른 사람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 많다. 이들 시에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회고취향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주로 사적(史蹟)에 얽힌 감회와 복고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시상을 처리하고 있다.
『풍요속선』은 이름이 알려져 있는 시인인 정민교(鄭敏僑)·정내교(鄭來僑)·엄계흥(嚴啓興) 등의 시는 고체시(古體詩)가 많다. 주로 사회 현실의 모순과 농촌의 황폐화 과정을 그려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의 처지가 그러한 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자조와 한탄을 아울러 노출시키면서 자신들이 배운 유교적 덕목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갈등 등을 표출시키고 있다.
『풍요속선』의 의의는 앞시대의 『해동유주』와 『소대풍요』의 정신을 계승하여 위항문학 활동을 절정에 이르게 한 것에 있다.
『풍요속선』의 간행으로 60년마다 이같은 위항시선집을 간행하는 전통이 생기게 되었으므로, 당시의 위항인들을 고무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시기의 『풍요삼선(風謠三選)』에는 더욱 방대한 양의 위항시가 선보이게 되었다.
『풍요속선』은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도서에 있다. 1980년 아세아문화사와 민족문화사, 1986년 여강출판사에서 세 차례 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