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출신. 1913년전주 신흥학교를 거쳐 1915년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 미국에 건너가 1925년 하버드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1928년 학위논문 「사회법칙 Social(Laws)」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조교로 있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하버드대학의 정규과정을 졸업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귀국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사회조사위원회 총무를 지낸 다음, 1931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문과과장)로 재임하는 한편, 흥사단에 가입, 독립운동에 힘썼다.
1945년 8·15광복 후에 『코리아 타임즈(The Korea Times)』를 창간, 사장에 취임한 것이 언론계에 투신한 시초였다. 이어 합동통신사 사장,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내고 월간 종합지 『신천지』를 창간하였다.
1945년 11월 10일 아놀드(Arnold,A.V.)군정장관이 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일신보』에 대하여 정간명령을 내린 뒤, 미8군사령관 하지(Hodge,J.R.) 중장에 의하여 『매일신보』의 재산관리인으로 임명된 것이 『서울신문』 창간에 관여하게 된 첫 계기를 이루었다.
먼저 매일신보 자치위원회와 타협하여 오세창(吳世昌)을 초대 사장으로 추대한다는 조건 아래 『매일신보』를 정식 인수,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기 위한 인선에 착수하였다.
자신은 부사장 자리에 머무르고 오세창을 사장으로 추대하는 『서울신문』 창간 간부의 진용을 짬으로써 새로운 신문을 탄생시키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1949년 서울신문사 사장을 그만둘 때 좌익 누명을 쓰기도 하였다. 6·25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여 서울에 묶여 있을 때 북한의 끈질긴 회유에 불응하였다.
9·28수복 직후 병으로 건강이 나빠졌는데, 미국무성의 특별촉탁으로 임명되어 일본 주재 연합군총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이에 앞서 1947년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당선, 이듬해 인도에서 개최된 범아문화회의(汎亞文化會議)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뒤 국제문화협회장 · 한미문화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사회법칙』 · 『사회학입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