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 본명은 알 수 없으며, 영어이름은 낸시(Nancy)였다. 남편인 하상기(河相驥)의 성을 따서 하난사라 하였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다가 1896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이안대학(Ohio Wesleyan大學)으로 유학을 떠나 1900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자비로 유학한 첫 학생이며, 최초의 여성 학사학위 취득자이다. 1906년부터 이화학당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여성계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애국정신이 충만하여 지각이 없는 여학생들에게 엄한 훈계와 매서운 꾸짖음으로 여성으로서의 각성과 향학열을 촉구하였다.
1907년 진명부인회가 주최한 집회에서 최초의 여류연사로 등단하여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자혜부인회에서 주최한 집회에서는 김윤식(金允植)·유길준(兪吉濬) 등 당대의 유명한 남성들과 함께 연설하기도 하였다.
1910년 신흥우(申興雨)와 함께 미국에서 열린 감리교 집회에 우리 나라 여성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그 뒤에도 몇 차례에 걸쳐 미국에 가서 우리 나라를 소개하는 연설을 하여 희사받은 돈으로 이화학당 시설의 현대화에 사용하였다. 이러한 국제적 활약으로 국권상실 직후부터는 일본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우리 나라 여성대표로 참석하려는 계획이 일본경찰에 알려져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북경(北京)에서 병으로 객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