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지리지에 기재되어 있는 하주는 같은 책 직관지의 하주정(下州停)과 결부되어 매우 혼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 연혁과 변천을 잘 알 수 없지만, 다만 하주가 555년(진흥왕 16)에 비사벌(比斯伐 : 지금의 창녕)에 처음 설치된 점과 그 명칭이 상주(尙州)를 상주(上州)라 한 데 대한 대칭으로서 붙여진 것만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561년에 만들어진 창녕신라진흥왕순수비(昌寧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비자벌(比子伐) 군주(軍主)의 이름과 나란히 하주 행사대등(行使大等)의 명칭이 보이고 있다.
그 뒤 565년에 하주는 치소(治所)를 대야(大耶 : 지금의 합천)로 옮겼고, 다시 642년(선덕여왕 11)에는 압량(押梁 : 지금의 경산)으로 옮겼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하주는 661년(태종무열왕 8)에 다시 본디의 대야로 옮겼는데, 665년(문무왕 5)삽량주(歃良州)가 신설되면서 그 영역의 절반 가량을 떼어주게 되었다. 삼국통일에 따른 지방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685년(신문왕 5)에 완산주(完山州)와 청주(菁州)가 신설됨으로써 하주는 폐지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