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여러 시대에 걸쳐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조선시대에도 간혹 쓰였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당시 동방 사회의 하층민을 지칭하던 하호는, 2∼3세기 무렵 한국 고대 사회의 사회 구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한국사에서 역사적 학술어로서의 하호는 사실상 ≪삼국지≫ 동이전 및 이와 같은 시대의 저술인 ≪위략 魏略≫의 것에 한정된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하호가 쓰인 용례를 살펴보면, 부여조에서 “邑落有豪民民下戶皆爲奴僕(읍락유호민하호개위노복)”(宋本)이라 해 3세기 무렵 부여의 읍락을 구성하는 계층으로서 하호의 존재를 기술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호민, 민, 하호의 세 계층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호민, 민=하호의 두 계층으로 볼 것인지이다.
이를 위해서는 ≪삼국지≫ 동이전에서 하호가 쓰인 다른 용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조(濊條)에는 “대군장은 없으며, 한(漢) 이후 그 관에는 후(侯)·읍군(邑君)·삼로(三老)가 있어 하호를 통솔하였다.”라고 해 동예의 읍락 구성을 후·읍군·삼로와 하호의 두 집단으로 파악했음을 보여 준다.
왜인조(倭人條)에는 “그 풍속에 대인은 4, 5명의 아내를, 하호는 혹 2, 3명의 아내를 거느렸다······ 하호가 길에서 대인을 만나면 곧 길 옆의 풀밭으로 피한다.”라고 해 대인과 하호를 대비해 기술하고 있다.
또 고구려조에는 발기(拔奇, 發岐)가 이이모(伊夷模, 산상왕)와의 왕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하자, 소노부(消奴部)의 장과 함께 각 3만 명의 하호를 거느리고 요동의 공손강(公孫康)에게 투항했다고 하였다.
이 때의 하호 3만 명도 민(民) 아래의 어떤 다른 계층을 표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발기를 지지하는 집단과 소노가(消奴加) 휘하의 소노부의 일반 민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발기와 소노가로 대표되는 지배 세력과 하호를 대비시켜 구분하면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좌식자(坐食者)’와 ‘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하호’라는 표현도 두 집단을 대비시켜 서술한 방법이다. 곧 중국인이 당시 동방 사회에서 제가(諸加)나 호민·대인 등으로 표현했던 지배층과 대비되는 피지배민을 일률적으로 하호라 했고, 하호는 신분상으로 노예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 부여조의 기사는 ‘읍락에 호민이 있고, 민은 하호로서 모두 노복과 같은 처지에 있다.’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한편 波古閣本에서는 民下戶를 名下戶라 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에 따르더라도 ‘하호라고 하는 것은’의 뜻이니, 부여의 읍락 구성을 호민과 하호의 두 집단으로 나누어 파악한 것으로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호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한대(漢代) 이후 계속 사용되어 왔는데, 각 시대마다 뜻이 달랐다. ≪삼국지≫나 ≪위략≫이 편찬된 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대인 한대에 하호는, 부강한 호족으로서의 상가(上家)와 대비되는 무력하고 빈한한, 그러나 독자적인 자신의 가계(家計)를 가지며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소작농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이러한 뜻의 하호는 뒤이은 시기에 전호(佃戶)·전객(佃客)이라는 용어로 대치되었고, 후대의 하호는 3·5·9등으로 나누는 호등제에서 하등호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아무튼 한대에 사용된 하호의 개념은 ≪위략≫이나 ≪삼국지≫에 나오는 하호의 의미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 동방 사회의 하층민의 처지가 중국 소작농과 유사하다고 느껴, 그들을 표현하는 데 동일한 용어로서 하호라고 기술했을 개연성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하호라고 표현된 당대 동방 사회의 피지배민의 처지가 한대의 하호와 사회 구조적인 면에서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당시 중국인이 동방 사회를 살펴보았을 때 외형상으로 빈한하고 열세한 일반 민의 존재를, 당시 자기들 사회의 빈한한 민을 가리키는 하호라는 용어로 기술한 것뿐이다.
따라서 하호의 사회적 성격은 당대 동방 사회의 역사적 성격에 의해 규정 지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동일한 용어로서 하호라고 기술했지만, 각 종족 집단의 정치적 상황와 사회 분화의 정도에 따라 현실적으로 그 성격에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일률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구체적으로 그 용례와 각 종족의 상황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동예의 경우를 살펴보면, 하호를 통주(統主)했다는 후·읍군·삼로라는 존재는 한군현시대 이후 중국인이 내린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던 읍락의 거수(渠帥)들이다. 그들은 대군장의 지배 세력이 아직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 읍락별로 자치를 영위하고 있었다.
각 읍락은 산천을 경계로 한 일정한 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구역 내의 산림과 하천 등을 공유지로 보유하였고,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는 산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남의 읍락에 침범했을 때에는 생구(生口)나 우마(牛馬)를 배상으로 지불해야 하였다.
이 생구의 존재로 보아 노예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사회 분화가 별로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내예왕(不耐濊王)까지도 민간과 섞여 함께 거주했다고 함은 이를 말해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호들이란 곧 이 읍락 공동체의 일반 구성원들이었다. 그리고 하호의 처지는 일차적으로 공동체적 유대 관계의 제약하에서 거수와 읍락 구성원의 관계로 규정 지어졌으며, 이차적으로는 읍락별로 고구려에 의해 지배, 수탈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옥저도 마찬가지였다. 옥저를 복속시킨 고구려는 거수들로 하여금 읍락을 자치하게 하고, 그들 중 대인(大人)에게 사자(使者)의 벼슬을 주어 고구려 통치 조직의 말단에 귀속시킴으로써 읍락들을 통괄 조정하였다.
그리고 대가(大加)에게는 거수를 통해 거두어들인 조세와 포·물고기·소금 등의 공납물을 본국에 수송하게 하는 책무를 맡겼다. 아울러 미녀도 징발해 갔다. 동예나 옥저의 경우, 읍락의 하호는 일종의 집단 예민과 같은 처지였다.
고구려의 하호는 ≪삼국지≫ 동이전에 나타나는 용례에서 볼 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발기와 소노가가 각 3만 명의 하호를 이끌고 공손씨(公孫氏)에게 투항했다는 기사에 나오는 하호로서, 발기나 소노가 같은 대가(大加)들에 의해 통솔되던 소노부의 부원과 같은 일반 민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하호가 구체적으로 지배층에게 수탈당하는 계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 용례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으며 좌식자가 1만여 명이고, 하호는 물고기, 소금, 식량을 날라 와 공급한다.”라고 한 것과 ≪태평어람≫에 인용된 ≪위략≫의 “대가는 농사를 짓지 않으며, 하호는 부세를 바치는데 노객(奴客)과 같은 처지이다.”라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다.
부여의 경우에도 “적이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스스로 싸우고 하호는 식량을 운반한다.”라고 하였다. 이 때 전투에 참가한 것이 족장층일 수만은 없다. 제가들을 위시해 ‘집집마다 무기를 갖추고 있던’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상당수의 읍락 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장을 갖추지 못하는 빈약한 읍락 민들은 하호로서 보급품의 운반을 맡았던 것이다. ‘부여의 읍락에 호민과 하호가 있고, 하호는 노복과 같은 처지’라고 했을 때의 하호는 이러한 빈약한 읍락 민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과 ≪위략≫에 나오는 하호는 이상에서 살펴본 용례에 따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첫째, 하호는 2∼3세기 무렵 중국인들이 동방 사회를 살펴보았을 때, 제가나 읍락의 거수와 그들이 통솔하던 일반 민, 그리고 대가·좌식자·호민 등으로 표현된 부강한 세력에 예속되었던 빈한한 민을 일률적으로 가리켰던 것이다.
둘째, 이들 동방 사회의 하호는, 당대의 중국 사회에서 자신의 가계를 가지며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가난한 소작농을 말하는 하호와 동일한 사회적·역사적 성격을 지닌 존재로 볼 수 없다. 중국인이 보았을 때 외형상 중국의 하호와 비슷한 빈한하고 무력한 민을 하호라고 지칭했을 뿐이다.
셋째, 동방 사회의 피지배민 및 빈한한 민을 일률적으로 하호라 지칭했지만, 각 종족과 집단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 분화의 정도에 따라 그 성격에 차이가 있었다. 즉, 하호 자체가 어떤 일정한 성격을 띤 사회 계층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가령 동예나 옥저의 하호는 읍락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일종의 집단 예민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사회적 계층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 하호는 빈농·용작농 및 귀족의 예속 농민 등으로 보인다. 1930년대 이후 현재까지 제기된 하호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노예론이다. 이는 다시 하호를 고전적 노예로 보는 견해와, 노예의 아시아적 변형인 고대 동방의 총체적 노예로 보는 설로 나누어진다.
둘째는 봉건론자들의 견해이다. 이 역시 하호를 농노로 보는 견해와, 봉건 관료제 국가의 일반 민 또는 봉건국가와 그 봉건적 지배 세력에 예속된 가난한, 그러나 농노는 아닌 민에 대한 범칭(汎稱)으로 보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셋째는 공동체적 질서하에서 상가(相加)나 거수 등의 족장에게 지배되었던 읍락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