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마을의 마을굿에서 탈놀이에 쓰이던 탈이다. 하회탈로는 주지(2개)·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 10종 11개가 전하고 있다. 이 밖에 총각·별채·떡다리탈 등이 있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병산탈로는 2개의 탈(대감탈·양반탈로 불러왔다.)이 현전한다.
우리나라의 탈은 대륙 전래의 기악면(伎樂面)·무악면(舞樂面)·행도면(行道面)·불면(佛面) 등의 도법(刀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을 것이나, 현존하는 옛 가면 중에서 마을굿에 쓰이던 신성가면의 성격을 지니면서 예능가면으로도 쓰인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 하회탈과 병산탈이다.
하회탈은 이른바 심목고비(深目高鼻: 코가 크고 쑥 팬 눈두덩이)의 기악면적 골격과 사실주의적 수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악면이 가지는 양식화된 표현과 좌우불상칭의 수법 및 중간 표정들을 보인다.
각시·중·양반·이매·부네탈 들은 실눈으로 반개(半開)이며, 중·양반·이매·선비·백정탈 들은 턱을 따로 달아 움직일 수 있어 표정의 변화가 가능하고, 얼굴을 숙이면 어둡고 뒤로 젖히면 밝은 표정의 효과를 더하는 중간표정을 볼 수 있다.
각시·부네·할미탈 들은 턱이 움직이지 않고 좌우상칭이나, 양반과 선비의 머슴역인 초랭이와 이매탈은 좌우불상칭의 수법을 써서 좌우 안면근육의 방향, 구각(口角)의 좌우의 높이, 좌우비익(左右鼻翼)의 각도, 주름살의 방향들이 달라 움직임에 따라서 그 표정이 변화하고 살아 움직이며 희극적인 효과를 더하고 있다.
고정된 표정을 가진 탈로 하여금 이와 같이 움직일 수 있는 폭을 가지게 했다는 것은 선인들의 오랜 경험에서 얻은 발명의 결과가 아닐 수 없으며, 기악면에서 무악면으로 옮겨간 흐름과 또 일본의 노가쿠[能樂: 일본 고유의 가면음악극] 중의 가면인 노멘[能面]으로 옮겨간 중간적 위치를 보여준다.
하회탈 중 초랭이와 병산탈 2개는 무악면적인 수법을 보여주는 예로, 사실적인 수법의 다른 가면들에 비하여 대담한 감도법(減刀法)을 써서 더욱 도식화되고 양식화된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하회탈의 9개의 인면(人面) 중 5개와 병산탈은 이른바 ‘절악(切顎)’으로 턱을 따로 달아 움직이게 되어 있고, 한편 완전히 한국화된 얼굴로 각시·부네·이매 등이 있다.
우리나라 탈들의 재료는 대개가 종이나 바가지인 데 비하여 하회탈과 병산탈은 드물게 나무탈이며, 용재는 오리나무로 조각하고, 그 위에 옻칠을 두 겹 세 겹으로 올려 정교한 색을 내고 있다.
이 탈들의 제작자와 제작 연대는 미상이다. 마을에는 허도령이 제작하였다는 전설과 하회마을의 입주자에 대해서,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유씨 배반(柳氏杯盤)”이라는 말이 전하는 것으로 미뤄볼 때, 대체로 고려 중기까지는 허씨, 그 뒤에 안씨가 입향하였고, 나중에 유씨는 조선 초기부터 정주하였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하회탈의 제작 연대를 고려 중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일본에서 대륙 전래적인 노가쿠[能樂]가 완성된 때는 14세기 중엽으로 우리나라 고려 말 공민왕 때에 해당된다. 이러한 점과 하회리에 전하는 허도령 전설 등을 감안할 때, 하회탈과 병산탈의 제작연대를 고려 말기 이전, 대체로 고려 중기(11∼12세기)로 추정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는 또 고려청자의 전성기로 고려인들의 미의식이 극도로 발달하였으며, 고려인들의 예술가로서의 잠재적 능력을 과시한 때이기도 하다.
이 탈들은 기악면에서 무악면으로 옮겨가는 추이와, 또한 일본 노멘으로 옮겨간 중간적 위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중국 본토를 거쳐 일본에까지 전해진 중앙아시아계통의 조각이며, 극동지역 전체의 가면 조각에 입각한 희귀한 조각들이다. 우리나라 가면사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가면사를 위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964년 국보로 지정된 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던 안동 하회탈 11점 및 병산탈 2점은 2017년 12월 27일 안동민속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