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청산리대첩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는 단일전선을 구축하지 못하고 일제에 의하여 시베리아로의 이동을 강요당하였다. 이의 반성으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단체의 단일노선 구축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안창호(安昌浩)는 상해(上海)와 북경(北京)을 왕복하면서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주창하였는데, 북경의 원세훈(元世勳)이 이에 동조하여 각 지역에서 먼저 독립단의 세포조직을 구축한 뒤 이를 기초로 유일당을 결성할 것을 제의하였다.
원세훈은 즉시 3차에 걸친 회의를 소집하여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를 조직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상해에서도 촉성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상해·북경·한커우(漢口)를 순방하던 김성숙(金星淑)이 북경촉성회의 집행위원 장건상(張建相)을 만나 북경에 독립당촉성회가 성립된 경과를 듣고 공명하여 광둥에 돌아와 5월 이 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혁명동지회 집행위원이며 의열단원인 김성숙과 정학빈(鄭學彬, 일명 鄭有燐)이 발기하였으며, 회원 170명은 대부분 혁명동지회와 의열단원이었다. 1927년 11월에는 북경촉성회의 제의로 상해에서 개최된 독립촉성회연석회의에 정학빈을 광둥대표로 파견하였으며, 그 뒤의 활동은 부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