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한초길(韓初吉). 함경남도 함흥 출신.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했다. 외세다[早稻田]대학을 다녔다. 1923년 8월 동경(東京)에 유학 중 함경북도 출신 학생들의 동인구락부 강연회에서 ‘이상과 현실의 모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26년 10월 함흥청년회 주최 강연회에서 ‘계급구성의 과정’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12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학우회 강연단의 일원으로서 함흥, 금산, 이리 등지에서 강연했다. 같은 해 조선공산당 일본부 선전부원 및 동경(東京) 동부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초대 책임비서를 지냈다. 그해 신간회 동경지회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책임비서 박낙종(朴洛鐘)이 검거되자, 김한경(金漢), 이우적(李友狄), 인정식(印貞植) 등과 일본총국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3월 『대중신문』, 『현계단』 책임 편집위원이 되었고, 4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해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30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4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33년 9월 만기출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