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신보 ()

언론·방송
문헌
서울에서 일본인 아다치 겐조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위한 선전 기관지로 1895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정의
서울에서 일본인 아다치 겐조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위한 선전 기관지로 1895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개설

한성신보의 사장은 아다치 겐조〔安達謙藏〕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일본 외무성의 기밀보조금으로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격일간 4면 가운데 3면은 국한문 혼용, 1면은 일어의 격일간으로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위한 선전 기관지였다. 이 신문이 창간되던 때는 아직 ≪독립신문≫이 창간되기 전이었으므로 ≪한성신보≫는 서울에서 발간되는 유일한 신문이었다. 을사조약 후인 1906년 8월에는 통감부에서 ≪한성신보≫와 역시 일인이 발행하던 ≪대동신보(大東新報)≫를 인수, 통합하여 통감부의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가 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신문은 청일 전쟁 개전과 함께 경성에서 한국인까지 대상으로 하는 신문을 발행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신임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가 주도하여 발행하였다. 당시 지방에서 일본인이 발행하는 일본어 신문들이 한국인들에게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던 상황에서, 그는 ‘친일파의 세력결립과 확대, 그리고 이들을 통한 내정개혁 추진’이라는 상황적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 때 마침, 부산 영사의 소개로 만나게 된 아다치 겐조〔安達謙藏〕의 건의에 따라 ≪한성신보≫의 발행을 결정하였다. 이후 아다치가 작성하여 일본 외무성에 보낸 창간계획서가 받아들여지면서 신문발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창간 당시 편집진 구성 등 인사에 관한 권한은 이노우에의 후광을 입은 아다치에게 완전히 일임되었다. 사장을 맡은 아다치는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기자 사사키 타다시〔佐佐木正〕, 국문기자 윤돈구(尹敦求) 등으로 편집진을 구성하였다. 언론계 경험이 많지 않았던 인물인 아다치에 의해 채용된 ≪한성신보≫의 기자들은 언론인이라기보다 한국침략을 위해 활동하는 일종의 전위적 활동집단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한글기사를 담당하도록 하기 위해 채용한 윤돈구는 탁지부 대신 등을 지낸 윤용선(尹容善)의 조카이자, 궁내부 협판 등을 지낸 윤정구(尹定求)의 동생이다. 이는 그가 고위 관직자의 인척으로서 취재활동 등에 유리하다는 점 때문에 채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신보≫의 지면구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면과 2면은 국문 또는 국한문 기사, 3면은 일문기사, 4면은 광고로 되어 있었다. 특히 창간 초기에 주로 한글기사가 실렸던 1면에는 사설, 잡보(雜報), 기서(奇書)란이 있었고, 2면에는 관보초록(官報抄錄), 사고(社告)란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지면구성에는 비교적 변동이 많아 편집체제가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글을 위주로 한 다양한 기사 양식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후의 ≪독립신문≫ 등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용

한국인에 의해 발행되는 신문이 하나도 없던 상황에서 창간초기 이 신문은 노골적 침략야욕보다는 개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조를 보였기 때문에 창간과 함께 한국인 독자들에게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이 신문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서 일본 외무성 기관지로서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한성신보사는 경성 낙동(駱洞)에 있었는데, 창간되던 해인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비밀본거지가 되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지시를 받은 사장 아다치는 신문사 사원들과 일인 낭인들과 함께 민비를 살해하는 사건에 가담하였다. 사건에 대한 당시 ≪한성신보≫의 보도는 명백한 왜곡보도의 작태를 보였는데, 이 사건이 대원군과 훈련대가 주도한 것으로 보도하였다. 이 사건이 일인들이 저지른 만행임이 숨길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나자 일본 측은 불리한 국제여론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아다치를 비롯한 신문사 관계자 등 50여 명을 일본으로 소환하여 히로시마〔廣島〕 지방재판소의 예심에 회부하였으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관련자 전원에게 면소(免訴) 판결을 내렸다. 이듬해 2월 ≪한성신보≫에는 한국의 국체(國體)를 모독하는 기사가 실렸다. 또한, 4월 19일자에는 고종의 아관파천을 비웃는 동요를 실어 국민의 격분을 샀으며, 이는 외교문제화되기까지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 외무성의 기관지로서의 성격을 이 신문의 기본적 사명이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고 또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한성신보≫가 일본의 주장과 이익을 대변했다는 점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전혀 없던 상황에서, 일본 본토의 영향으로 편집과 인쇄의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뛰어났던 ≪한성신보≫는 한글을 위주로 한 다양한 기사 양식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어떤 형태로든 한국 근대신문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韓國言論史硏究』(鄭晉錫, 일조각, 1983)
「구한말 일본의 침략적 언론활동 : 『한성신보(1895~1906)을 중심으로』」(박용규, 『한국언론학보』제43권 제1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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