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9년(의종 3)에 만수절사(萬壽節使)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왕이 정사를 소홀히하자 대관(臺官)으로서 시사(時事)를 간언하였으나 3일 동안 회보가 없자 문공원(文公元)·유필(庾弼)·김영석(金永錫) 등과 더불어 죄를 청하고 일을 보지 않으니, 의종은 이들을 불러 위유(慰諭)하였다.
1151년 내시 윤언문(尹彦文)이 괴석(怪石)을 모아 수창궁(壽昌宮) 북쪽에 가산(假山)을 만들고, 그 곁에 만수(萬壽)라는 작은 정자를 지어, 누런 비단으로 벽을 입히는 등 사치를 다하여 사람의 눈을 현혹하게 하니, 왕은 자주 이곳에 들러 그들과 함께 환락을 다하였다.
이 때 시어사(侍御史)로서 어사중승(御史中丞) 고영부(高瑩夫) 등과 대궐에 나아가 3일 동안 엎드려 이들을 내칠 것을 상소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두문불출하다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신숙(申淑)의 상소로 관철되었다.
뒤에 이부시랑(吏部侍郎)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원응(李元膺)과 사이가 좋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왕이 인제원(仁濟院)에 따로 불사(佛寺)를 지을 때 이를 맡았던 이원응이 죽자 복직되어 그 공사를 인계받아 완성하였다. 이 공으로 은(銀)과 비단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