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고(師古), 호는 복재(復齋). 한양 출신. 밀직 힌영(韓英)의 아들이다.
1304년(충렬왕 30) 과거에 급제해 사한(史翰)에 들어갔고 충숙왕 때 사관수찬(史館修撰)이 되었다.
그 뒤 예문관응교가 되었고, 1320년(충숙왕 7) 정방(政房)의 전주(銓注: 인사행정)에 참여하였다. 이 때 심왕 왕고(瀋王 王暠)가 왕위를 노려 충숙왕과 대립하자 왕을 위해 노력한 이조년(李兆年)과 더불어 의논해 간신을 잡아 물리쳐, 심왕에게 왕위를 전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331년(충혜왕 1)에는 밀직제학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뽑게 되었다. 이 때 최안도(崔安道)의 아들 최경(崔瓊)이 부정으로 합격하자 간관 허옹(許邕), 정언 조렴(趙廉)·정천유(鄭天濡) 등이 글을 올려, 시험이 공정하지 못하다며 다시 시험을 치를 것을 청하였다.
또한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頔)의 난 때에는 정승 김륜(金倫)과 함께 이 난을 처리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조적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려갔는데 이 때 시종 충절로 충혜왕을 변호하였다. 그 결과 1등공신으로 책봉되었고, 부모와 아내와 자식에게도 벼슬이 주어졌으며, 전답과 노비도 받게 되었다.
1343년에는 한양군(漢陽君)에 봉해지고 찬성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왕이 악양(岳陽)에 행차할 때에 왕에게 충성한 사람은 한종유와 이조년뿐이었는데, 이조년이 별세하자 원나라에서 원자(元子)를 부탁하고자 한종유를 불렀다.
1344년에 조칙으로 충목왕을 모시고 귀국해 정사를 보필하게 되어 좌정승에 임명되었다. 충정왕이 왕위에 오른 뒤 권신들이 정치를 멋대로 처리하자 부원군(府院君)으로 향리에 물러앉아 도읍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1352년(공민왕 1)에는 김승택(金承澤)과 함께 서연(書筵)에 들어가자 왕이 예우로써 대접하고 재상을 삼고자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