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 A5판. 70면. 1949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하였다. 작자의 첫 시집으로 「전라도길」·「손가락 한마디」·「벌」·「목숨」·「삶」 등 25편의 시와, 그를 시단에 소개한 이병철(李秉哲)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이 나올 때 한하운은 방랑생활 중인 나병환자였다.
이 시집과 그 뒤에 발표된 그의 모든 시에는 나병환자라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과 그에 따른 처절한 체험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 체험은 그 자체가 특이한 것이기에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하운은 감상을 자제하고 그것을 객관화함으로써 표현 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 ‘소록도로 가는 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전라도길」에는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이 시의 제5연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는 대목은 제6연의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과 더불어 화자의 나병이 절망적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하는 객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객관성은 화자의 비통한 체험에 대한 상상적 추체험(想像的追體驗)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는 또 처참하게 버림받은 자의 애절한 꿈을 민요적 가락으로 읊은 시도 수록되어 있다.
「파랑새」라는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소월시(素月詩)의 민요적 기풍을 방불하게 하는 이러한 경향은 제2시집 『보리피리』에 수록되어 있는 「보리피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시집은 한국 신문학사에 등장한 최초의 나환자 시집으로서, 특이한 체험을 객관적인 어조로 혹은 민요적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