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장춘(金長春). 함경남도 북청 출신이다.
1922년 8월 창립된 평양조선노동동맹회에서 활동하다, 10월에 서울파 공산주의그룹(1923년 2월 고려공산동맹이라 칭함)이 조직되자 평안남도 오르그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1923∼1924년 평양인력거부 조합장, 양말직공조합 상담역 등을 맡아 노동운동에 전념하였다.
1923년 7월 평양조선노동동맹회 회원으로서, 평남 대동군과 진남포에서 개최된 동맹회 주최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 6월 평양노농연합회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8월 평양에서 ‘오월청년회’ 독서부 결성에 참여했다가 검거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복역, 12월에 출옥하였다.
1925년 10월에는 서울파 사상단체인 전진회(前進會)에, 1926년 4월에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준비위원 55인 가운데 1인으로 참여하였다. 그 해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황포군관학교 강사로 활동했던 조선인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과 교분을 맺기도 한다. 김산은 그가 1930년 6월 서울 남대문 감옥에서 사망할 때 「한해 동지를 조문하며(弔韓海同志)」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1927년 12월 귀국,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3차 당대회(‘ML파’)에서 조직부 위원으로 선출되고, 1928년 3월∼4월 개최된 프로핀테른 제4회 대회에 김경식과 함께 파견 대표자로 선임되어 모스크바에 갔다. 4월 귀국하여 프로핀테른의 대회 상황과 협의 내용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하였다. 평양경찰서에 검거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 해 7∼8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엠엘파(ML派) 공산주의그룹 지도자들과 함께 코민테른 「12월테제」에 입각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문제를 협의하고, 한빈, 고광수, 양명 등과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9년 5월 길림(吉林)에서 책임비서에 선출되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이다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