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2만 727㎡.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며, 유적의 동쪽에는 남계천이 흐르고 있다.
이 유적은 구릉 주위에 열을 지어 남아 있는 고분 20여 기와 그 사이사이에 무수하게 분포되어 있는 작은 수혈식석곽묘로 형성된 규모가 큰 고분군이다.
북쪽 일부를 1980년 3월 25일부터 5월 25일에 걸쳐 부산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발굴된 고분은 수혈식장방형석실묘 5기와 그 주변에 있는 작은 수혈식석곽묘 21기였다.
이 고분들의 장축(長軸)은 대개 남북향이었고 머리방향은 북향이었다. 수혈식장방형석실묘(제1∼5호분)는 너비 14m 내외, 높이 2m 정도의 원형 봉분(圓形封墳)이 남아 있다.
측벽은 모두 냇돌로 쌓았고 뚜껑은 장방형의 긴 돌로 덮었다. 주실(主室)의 동쪽이나 서쪽에 반드시 수혈식석곽으로 된 부곽이 나란히 배치되어 주실과 부곽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다곽묘(多槨墓)이다.
특히, 제1호분은 봉토 내에 주실·부곽 외에 작은 수혈식석곽묘 1기가 추장(追葬)되었다. 제3호분은 주실·부곽 외에 옹관묘(甕棺墓) 1기가 배장(陪葬)되어 있었다. 제5호분은 부곽이 없고 대신 주실인 석실 2개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그 밖에 가장 특징적인 구조의 하나로 제5호분을 제외한 나머지 4기의 주실 바닥 주위에서 다수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이 기둥구멍들은 석실 양장벽을 따라서 약 80∼100㎝(큰 석실의 경우에는 140∼150㎝) 정도의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이것은 나무기둥을 같은 간격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판자 등을 끼워서 석실의 크기에 알맞은 큰 목곽을 만들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고분 주위에 산재한 작은 수혈식석곽묘는 크게 파괴, 도굴되어 완형분은 하나도 없었다. 역시 냇돌로 쌓은 일반적인 형태이다.
유구의 규모는 수혈식장방형석실묘는 주실이 길이 520∼735㎝, 너비 100∼110㎝, 높이 100∼175㎝ 내외이고, 부곽은 길이 300㎝, 너비 45㎝, 높이 100㎝ 내외이다. 작은 수혈식석곽묘는 길이 300∼350㎝, 너비 70㎝ 내외이며 높이는 파괴가 심해 알 수 없었다.
유물은 토기류·철기류·장신구류 등 200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토기류이다. 이것은 토기류가 주로 부장(副葬)된 부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었으나 철기류와 장신구류가 부장된 주실은 대부분 파괴, 도굴되었기 때문이다.
토기는 주로 도질토기(陶質土器)이고 연질토기(軟質土器)는 적었다. 기종은 유개식원저장경호(有蓋式圓底長頸壺)·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평저단경호(平底短頸壺)·유개양이부대부완(有蓋兩耳附臺附盌)·유개합(有蓋盒)·고배(高杯)·발형기대(鉢形器臺)·낮은 통형기대(筒形器臺) 등이 있다. 특히, 유개식원저장경호와 원저단경호가 발형기대 및 낮은 통형기대와 결합되어 출토되는 예가 많고 대부장경호는 아주 적었다.
이 토기들은 고령 지산동 제44·45호분 출토 토기들과 기형·기종·성격 등이 거의 같다. 또한 진주를 비롯한 서부 경상남도지방의 여러 고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연대는 대개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이 백천리고분을 통해 함양·진주를 비롯한 서부 경상남도지역과 고령 등지의 가야문화가 동일문화권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가까운 함양읍내와 생초면 등에도 고분이 산재해 있고, 1971년에 동아대학교에서 발굴한 상백리고분(上柏里古墳)도 출토유물로 보아 이 지역에는 고총고분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함양 일대에 다수의 고분이 존재하는 사실은 지금까지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가야소국(伽倻小國)의 하나가 이 곳에 있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