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댐 수몰지구에 포함되어 1986∼1987년 사이에 영남대학교가 A지구, 창원대학교가 B지구, 효성여자대학교가 C지구, 경북대학교가 D지구, 부산대학교가 E지구를 맡아 발굴조사하였다. 조사결과 C지구에서 집자리(住居址) 7기, E지구에서 고인돌(支石墓) 8기와 그 밖에 신석기시대로 추정되는 구덩유구(竪穴遺構) 1기, C·D·E지구에서 가야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이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 등이 확인되었다. 이 일대는 구덕산과 소용산에 의해 앞뒤가 막혀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덕천 양안의 좁은 곡간지에 경작지가 조성되어 있다. 집자리는 임야 237번지 일대 구릉의 경사가 비교적 급한 남쪽 사면에 위치하여 잔존상태가 나빴으며, 고인돌은 남쪽에 있는 덕천(德川)과 마을 뒷산 사이에 발달된 충적지에 동서 2열로 입지한다.
집자리는 평면형태가 모두 장방형으로 추정되며 크기는 3호 590×(잔)132×34㎝, 4호 230×(잔)63×12㎝, 6호 480×(잔)270×40㎝이다. 내부에는 벽도랑(壁溝), 기둥구멍(柱穴), 화덕자리(爐址)가 있다. 벽도랑은 산사면의 높은 쪽에 있으며, 화덕자리는 얕게 판 구덩식(竪穴式)으로 한쪽에 치우쳐 1기가 있다. 유물은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얕은바리모양토기(淺鉢形土器), 긴목항아리(長頸壺), 항아리모양(壺形)의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가 출토되었으며, 문양은 골아가리무늬(口脣刻目文)와 구멍무늬(孔列文)가 새겨져있다. 석기류는 간돌검(磨製石劍)편, 슴베있는간돌화살촉(有莖式磨製石鏃), 삼각만입돌화살촉(三角灣入石鏃), 돌끌(石鑿), 돌낫(石鎌), 숫돌(砥石) 등과 4호에서 원판형의 흙으로 만든 그물추(土製 漁網錘) 51점이 출토되었다.
E지구의 고인돌군은 깬돌(割石)을 깔아서 개별 묘역(墓域)을 만들고 그 중앙부에 고임돌(支石) 없이 무덤방(墓室)을 둔 개석식(蓋石式)이 대부분이다. 부석시설(敷石施設)은 평면형태 장방형으로 크기는 7호 240×270㎝, 8호 600×1,000㎝로 다양하며, 대소형의 깬돌을 1∼3겹 정도로 깔고 가장자리는 대형의 깬돌을 정연하게 배치해 묘역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덮개돌은 무덤방 바로 위에 올려 뚜껑돌(蓋石)의 역할을 한 것과 뚜껑돌 위에 놓여 있는 것(6·8호)으로 구분된다. 무덤방은 지하식(地下式)과 지상식(地上式)으로 구분된다. 지상식의 무덤방은 뚜껑돌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바닥은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한 유사돌덧널형(類似石槨形)으로 1·2·3호가 있다. 지하식의 돌널형(石棺形)은 6·7호, 돌덧널형(石槨形)은 8호로 구분된다. 6호는 깐돌시설 없이 대형 깬돌 5매를 고임돌로 하고 그 아래 뚜껑돌은 납작판돌을 이용하여 3겹으로 눕혀쌓았다. 돌널의 크기는 66×32×33㎝로 벽석은 판돌을 세워 잇대고 바닥은 판돌 1매를 깔아 축조하였다. 8호는 265×100×85㎝로 부석시설 아래에 나무판(木板)으로 덮고 깬돌을 얹어 뚜껑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벽석은 깬돌을 이용하여 가로변쌓기를 하고 동단벽은 다소 엉성하게 세로변쌓기를 하였으며 바닥은 판돌을 1겹 깔았다. 특히 8호는 무덤방 동단벽에 무덤길(墓道)이 있는 앞트기식돌덧널형(橫口式石槨形)으로 삼국시대의 무덤축조 방식과 비교된다. 고인돌 내부 출토유물은 항아리모양의 붉은간토기, 깊은바리모양토기, 단추모양의 손잡이(把手)와 빗모양(櫛形) 반달돌칼(半月形石刀), 슴베있는간돌화살촉, 삼각만입돌화살촉, 자루달린간돌검(有柄式磨製石劍), 홈자루간돌검(二段柄式磨製石劍) 등이 출토되었다.
C지구와 D지구의 고분은 6세기 중엽경에서 7세기대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의 봉분과 그 주위로 돌아가는 둘레돌(護石)로 설정된 묘역의 중앙에 앞트기식돌방이나 굴식돌방을 주된 매장시설로 하고, 그 둘레에 2∼3기 정도의 작은 돌덧널(小形石槨)이나 독널돌덧널(甕棺石槨)을 배치시킨 고분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C지구의 1호 굴식돌방은 장방형의 돌방에 짧은 우편수식(右便袖式)의 널길(羨道)을 설치한 유구이다. 이 고분에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같은 유구 안에서 대가야식(大加耶式)의 목긴항아리(長頸壺) 및 굽다리접시(高杯)와 신라식 굽다리목긴항아리(臺附長頸壺)와 짧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가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은 이 지역의 토기양식이 대가야식에서 신라식으로 교체되었던 계기와 그 시점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변화는 곧 신라의 가야진출과 연관된 것으로 해석하여 그 시점을 6세기 중후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저포리유적의 A·B지구의 움무덤군(土壙墓群)이 3∼4세기에 조영되다가 2세기 정도 공백기를 거쳐서 6세기 중엽 이후 시기부터 C·D·E지구에 앞트기식돌방무덤이나 굴식돌방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저포리고분군의 전면적인 발굴조사는 가야지역 고분군의 전개과정과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