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기(基). 높이 178㎝, 너비 82㎝, 두께 18㎝. 197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602년(선조 35)에 설립하였다.
대리석재의 비로서 기단부는 묻혀 있다. 앞면의 상부에 약간의 균열이 있고, 측면에는 상부에서 하단까지 약 3㎝ 정도로 쪼개져 있으며, 마멸이 매우 심하여 부분적으로 수십자밖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비문은 최립(崔岦)이 짓고 한호(韓濩)가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元帥權公幸州大捷碑(원수권공행주대첩비)’ 9자의 두전(頭篆)을 썼다. 비음은 사위인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비문에는 막료와 사병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동기를 적고 있다. 즉, 1593년 2월 권율이 정예군 2,300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주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육박전으로 승리하고 적군의 깃발 · 투구 · 갑옷 · 무기 등을 노획한 혁혁한 전과를 밝히고, 권율의 가문과 같이 좋은 가문에서 비롯된 인격과 덕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밖에 없었으며 나아가 이를 기리지 않을 수 없어 비를 세운다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글씨는 해서로서 왕희지 서풍에 가깝게 매우 정중하고 단정하게 썼는데, 품격은 그리 높다 할 수 없으며 자가풍의 석봉체(石峰體)이다. 비음은 송설체의 것으로 역시 뛰어난 것은 아니나, 비의 전체가 마멸이 심하여 서체상의 특징이나 그 평가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