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大院君)의 가인(家人)으로 임오군변(壬午軍變)을 주동하였다. 경상도 순흥 출생. 아버지는 허전(許전(木+殿))이며, 어머니는 주소사(周召史)이다.
1882년(고종 19) 6월 5일 선혜청(宣惠廳)의 도봉소(都捧所)에서 일어난 군료분쟁사건을 계기로, 6월 9일 구훈련도감(舊訓鍊都監) 소속 군병들이 중심이 되어 군변을 일으켰다. 봉기한 군병과 이에 가세한 백성들이 선혜청당상 민겸호(閔謙鎬)의 집을 습격, 파괴한 다음 운현궁(雲峴宮)에 이르러 대원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김장손(金長孫)·유춘만(柳春萬) 등 군변 주동자에게 행동방침을 내리는 한편, 허욱에게는 군복을 입고 환도(環刀)를 소지한 다음 군병 200명을 지휘하여 군변을 확대시키도록 하였다.
그 결과 1883년 6월 7일과 8일 양일 간 군변 주동자로 지목, 체포되어 추국(推鞫)을 당하였다. 또한 장태진(張泰辰)·장순길(張順吉)·김창영(金昌榮)·유흥엽(柳興燁)·장재식(張在植)·이봉학(李奉學) 등 6명도 함께 추국을 당하였다.
포도청의 문초에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군복의 착용과 200명 군병의 영솔·지휘 등을 자복하였으나, 의금부(義禁府)의 정국(庭鞫)에서는 뇌형(牢刑: 주리를 트는 형벌)에 따른 난초(亂招)임을 주장, 혐의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였다.
특히, 김태희(金泰熙)·조종순(趙宗淳)·이경문(李景文)·고윤영(高允永)·지봉식(池奉植) 등 입궐하지 않았던 사람들과의 접촉을 들면서, 자신의 군병지휘설이 무초(誣招)임을 주장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3년 6월 9일 모반대역부도(謀反大逆不道)로 결정되어 다음날 종루(鐘樓)거리에서 능지처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