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공암(孔巖: 지금의 서울특별시 양천구).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지낸 허공(許珙)의 손자로, 충숙왕 때에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낸 허부(許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교하노씨(交河盧氏) 노영수(盧潁秀)의 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강릉대군 왕기(江陵大君 王祺: 恭愍王)를 따라 원나라의 연경(燕京)에 가서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통례문판관으로 서북면찰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다음해 감찰장령에 재직중 앞서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한 공으로 3등공신이 되었으며, 뒤에 판합문사(判閤門事)에 이르렀다. 이후 홍건적이 침입하자 병마사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나 이 때 사감으로 장군 최복량(崔福良)을 죽인 일로 왕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홍건적 격퇴 후 정승 김용(金鏞)에 의하여 섬에 유배되어 봉졸(烽卒)로 충군(充軍)되었으나 곧 소환되어 얼마 후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홍건적의 침입 때 서울을 수복하고 왕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양천군(陽川君)의 전횡을 비방하였다가 양천군의 미움을 사 청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