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문혁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삼별초의 난과 관련된 관리.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관련 사건
삼별초의 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고려후기 삼별초의 난과 관련된 관리.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1270년(원종 11)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盧永禧) 등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받들고 관부(官府)를 설치할 때, 강화를 탈출하여 개경(開京)으로 향하였다.

이때 추격해오던 4, 5척의 적선과 맞붙어 화살을 비 오듯 쏘자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다가 현문혁의 배가 물이 얕은 곳에 걸리어 적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이때 현문혁의 아내는 적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하고 두 딸을 껴안고 물에 빠져 자결하였으나, 현문혁은 적에게 붙잡혔다.

삼별초군은 현문혁의 용기를 아깝게 여겨 살해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탈출하여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이듬해 현문혁의 처는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의 처와 함께 굳은 절개 때문에 열녀로 표창되고 자손은 벼슬을 받았다. 1291년(충렬왕 17) 원나라의 반적 합단(哈丹, 카단)의 잔당을 추포하는 데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