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0년(원종 11)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盧永禧) 등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받들고 관부(官府)를 설치할 때, 강화를 탈출하여 개경(開京)으로 향하였다.
이때 추격해오던 4, 5척의 적선과 맞붙어 화살을 비 오듯 쏘자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다가 현문혁의 배가 물이 얕은 곳에 걸리어 적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이때 현문혁의 아내는 적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하고 두 딸을 껴안고 물에 빠져 자결하였으나, 현문혁은 적에게 붙잡혔다.
삼별초군은 현문혁의 용기를 아깝게 여겨 살해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탈출하여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이듬해 현문혁의 처는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의 처와 함께 굳은 절개 때문에 열녀로 표창되고 자손은 벼슬을 받았다. 1291년(충렬왕 17) 원나라의 반적 합단(哈丹, 카단)의 잔당을 추포하는 데 공을 세웠다.